최근 정가(政家)에서 권력구조 개편을 골자로 한 개헌(改憲) 이슈가 떠오르고 있다. 권력구조 개헌이란책임정치나 권력분산을 명분으로 현 5년 단임 대통령제를 4년 중임제나 정-부통령제, 의원내각제 등으로 고치는 것이다. 개헌론자들은 제2공화국을 제외한 역대 정권이 내각 아닌 청와대 비서실 중심의 국정 운영을 함으로써 '제왕적 대통령제'의 폐단을 드러냈다고 지적한다. 따라서 연임제를 도입해 중간 평가를 받게 하거나, 의회에서 선출한 총리의 조각(組閣)으로 국정을 이끄는 게 '권력이 집중되는 대통령제의 폐해'를 극복하는 길이라고 주장한다.
최근에는 차기 대선을 앞두고 아직까지 현 정권을 계승할 적자(嫡子) 후보를 낙점하지 못한 더불어민주당이 정국 돌파용으로 '개헌 카드'를 꺼내들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보궐선거에서 참패하면서 민심까지 잃은 여당이 안정적인 정권 재창출을 위해 개헌에 도전할 수 있다는 것. 지난 총선에서 대승한 결과로 거여(巨與)가 된 민주당이 압도적인 의석 수와 야당 유인책으로 내각제 등 의회 중심의 권력구조 개편을 시도할 수 있다는 얘기다. 제1야당인 국민의힘도 현재 마땅한 대선 후보를 마련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민주당과 개헌의 이해관계가 일치되기도 한다. 윤석열 전 검찰총장이 야권의 유력 후보로 거론되지만, 아직 입당 여부를 점치기 어렵다는 점에서 권력구조 개편은 야당의 정권 교체 방법으로 고려될 수 있다.
"개헌 통해 대선 판 흔드는 게 여권의 '플랜B'"
김형준 명지대 교수는 《월간조선》 2021년 5월호에 기고한 '정치포커스: 4∙7재보궐선거 이후 정국 시나리오'에서 "친문 대선 후보가 만들어질 가능성이 적은 상황에서 비문(非文)인 이재명 지사가 대권을 차지하는 것을 제도적으로 막기 위해 (여권이) 고안할 수 있는 것이 플랜B다"라며 "특히 재적의원 수의 3분의 2 가까운 180석을 확보한 범여권이 야당 개헌 세력과 연대해서 권력구조 개편을 위한 개헌을 통해 대선 판을 흔드는 것"이라고 진단했다.
김 교수는 "(권력구조 개헌이란) 5년 단임의 제왕적 대통령제의 폐해를 극복하기 위해 내각제로 전환하거나, 이원집정제식 대통령제를 통해 권력을 분산하는 것"이라며 "문재인 정권을 창출한 여권 핵심 세력은 유력 대선 후보가 없고, 이재명 경기지사는 지지율에 비해 정치 세력화가 덜 됐고 강력한 친문 비토 세력이 있다. 윤석열 전 총장도 지지율은 높지만 세력도 없고 정치 경험도 없기 때문에 의외로 (여야를 통틀어) 개헌 공감대가 만들어질 수 있다"고 설명했다.
《문화일보》도 지난 21일 '내년 대선 앞두고 개헌론 점화 가능성'이라는 제하의 기사에서 "2022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개헌론이 조기 점화하고 있다. 더불어민주당 내에 유력한 친문(친문재인) 주자가 없고, 국민의힘 역시 확실한 자당 후보가 없다는 점에서 이전 대선과 다르게 개헌론이 탄력을 받을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고 보도했다.
이 매체는 "아직 유력 대선 주자가 확실한 정치세력을 마련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서 개헌론은 대선판을 흔드는 블랙홀이 될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며 "이재명 경기지사, 이낙연 전 민주당 대표, 윤석열 전 검찰총장 등 유력 주자들과의 정파 간 합종연횡 요소로 작용할 가능성도 높다"고 진단했다.
《신동아》 또한 지난달 18일 '윤석열도 모르는 윤석열 大權 로드'라는 제하의 기사에서 "차기 대선은 1년도 남지 않았지만, 그 사이 정치권을 강타할 이슈는 수없이 많다. 권력구조 개편을 위한 개헌론 역시 언제든 대선 지형을 바꿔놓을 변수 가운데 하나"라며 "5년 단임의 폐해를 극복하기 위해 4년 중임 대통령제 또는 외치(外治)와 내치(內治)를 분리해 이원집정부제로 개헌하자는 개헌론은 보궐선거 이후 언제든 정치권에서 터져 나올 수 있는 이슈다. 특히 재적의원 수의 3분의 2 가까운 180석을 확보한 범여권이 4월 보궐선거에서 패할 경우 대선판을 흔들기 위해 개헌론을 꺼내 들 개연성이 높다"고 진단한 바 있다.
'개헌 불씨' 당기는 前現職 국회의장들
정치권에선 개헌의 불씨를 당기는 모양새다. 박병석 국회의장은 지난 1월 6일 화상으로 진행한 신년 기자간담회 모두발언에서 "진정한 국민 통합을 위해서는 개헌을 통한 권력구조 개편과 득표율에 비례하는 의석수를 확보하도록 하는 선거제도 개편이 필요하다"고 했다. 《연합뉴스》는 지난 20일 "박 의장은 오는 6월 1일께 국회 개원 1주년을 기념해 개헌 세미나도 열 것으로 전해졌다"며 "국회 관계자는 통화에서 '현재의 제도로는 국민이 분열될 수밖에 없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권력 분산을 핵심으로 하는 개헌이 필요하다는 것이 박 의장의 생각'이라고 말했다"고 보도했다. 이 매체에 따르면, 민주당에서도 곧 개헌 문제를 공론화할 것으로 알려졌다. 내달 2일 전당대회에서 새 지도부 취임을 계기로 당내 국가비전위원회가 설치되면 이를 통해 개헌 등 정책 과제를 논의할 것이라고 한다.
문희상 전 국회의장도 작년 5월 21일 의장 퇴임 기자간담회에서 "다시는 비선실세가 국정농단을 하지 못하도록 제왕적 대통령으로 권력이 집중되는 것을 막기 위해 내각제로 가야한다. 다만 국회에 대한 불신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에 책임총리제를 중간단계로 거치자는 것이 내 주장"이라며 개헌론을 꺼내들었다.
김종민 민주당 의원은 지난 4일 'MBN 정운갑의 집중분석'에 출연해 "저는 개헌 필요하다고 본다. 개헌을 통한 제도 변화도 같이 병행될 필요가 있겠다"며 "대선 전에 하던지, 대선 때 공약으로 제시해서 국민들의 심판을 받고, 그 공론 과정을 수렴해서 다음 대통령이 누가 되든 집권 1년 안에 개헌 작업을 하는 이런 방향으로 논의를 해보면 저는 가능하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내각제' 미는 야권 잠룡, 중진들
야권 정치인들도 개헌의 필요성을 공감하고 있다. 김무성, 정병국 전 국민의힘 의원은 작년 5월 27일 《데일리안》 대담에서 "권력 분산형 개헌, 순수 의원내각제" 개헌을 추천했다. 정 전 의원은 "지금 국회는 비판하고 문제 제기는 마음대로 하지만, 그것에 대한 결과를 책임지는 시스템이 아니다. 다원화된 4차 산업혁명 시대에 걸 맞는 제도는 순수 의원내각제"라고 말했다. 김태호 국민의힘 의원은 작년 10월 29일 마포포럼 강연에서 "집권을 우리가 가져와도 달라질 게 없다. 정치 시스템의 변화가 전제돼야 한다"며 "내각제와 중대선거구제 변화를 중심으로 한 개헌이 즉시 이뤄져야 한다"고 제안했다. 같은 당 정진석 의원도 지난 2월 17일 《문화일보》 인터뷰에서 "우리나라 대통령제만큼 대통령 1인에게 권력이 집중된 나라는 없다. 삼권 분립도 지켜지지 않는다"며 "대통령제는 수평적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 옷이다. 한국을 더 이상 행복한 미래로 이끌 수 없는 제도라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정 의원은 내각제를 추천하면서 "내각제에선 총리가 온종일 국회에 나와 모든 분야의 토론을 주재해야 한다. 실력 없는 총리는 나올 수가 없다"며 "다만 내각제로 가는 길이 멀다면 중간 단계에서 분권형 권력구조를 고민해볼 필요도 있다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김종인 전 국민의힘 비대위원장은 재임 시절인 지난 1월 《월간조선》 2021년 1월호 인터뷰에서 '2017년에 대권 도전을 선언한 일이 있다. 또 도전할 생각인가'라는 질문에 "그때도 내가 대통령 후보로 진짜로 나가려고 했던 것은 아니다. 당시는 개헌을 전제로, 개헌 분위기를 만들어보려고 출마 선언을 했다"며 "내가 선언을 하고 상황을 보니 당시 문재인 후보를 제외한 야권 진영에서는 개헌에 동참할 의도가 없어서 일주일 뒤 출마 선언을 접었다"고 술회했다.
'내각제 개헌을 하자는 건가'라는 질문에는 "내각제로 가자고 한 것"이라며 "다른 나라의 내각제는 좀 불안정하니까, 독일식 내각제는 정권이 안정될 수 있으니 그런 식으로 한번 가보자는 것"이라고 답했다.
대선 前 개헌은 '시기상조'?
권력구조 개헌은 정치권에서 오랫동안 거론돼온 사안이기도 하고 전현직 의원들이 대체로 동의하는 분위기인 것은 맞다. 관건은 '시기'와 '방향' 그리고 '민심'이다. 차기 대선이 1년도 남지 않은 지금, 여야의 잠룡들이 앞다퉈 대권 레이스에 뛰어드는 가운데 국민투표까지 거쳐야 하는 개헌 작업은 가능할 것인가. 개헌으로 개편될 권력구조는 4년 중임제인가, 내각제인가, 아니면 또 다른 형태의 권력 분산형 모델인가. 우리 국민은 개헌의 시기와 방향에 동의하는가. 정가에서 개헌 시나리오를 현실로 만들려면 이러한 난제들부터 풀어야 할 것이다.
지난 21일 오전 국회에서 국회의장 직속 국회 국민통합위원회 주최로 '국민 통합을 위한 정치제도 개선' 토론회가 열렸다. 이날 여야 발제자로는 민주당 김종민, 국민의힘 장제원 의원이 나왔다. 김 의원은 "정치 양극화와 정치 관료화를 극복하기 위해서 단기적으로는 청와대 중심 정부에서 총리와 내각 중심 정부로 전환해 '민주적 대통령제'로 가야 한다. 중장기 국정 계획을 위해서는 대통령제를 중임제로 바꾸는 게 필요하다고 생각한다"며 개헌론을 띄웠다. 그러나 장 의원은 "현재 시점에서 개헌 논의를 촉발하는 것이 맞는가, 현실 정치인으로서 실현 가능성이 있는가에 대해 고민을 하게 된다. 이미 대선 레이스는 시작됐고"라며 사실상 반대 입장을 밝혔다.
박상병 정치평론가는 지난 22일 《천지일보》에 기고한 '[정치평론] 대선 전 개헌은 어렵다' 칼럼에서 "문재인 정부 임기 초에도 개헌문제가 큰 이슈가 돼서 ‘초안’까지 만들어졌지만 정치권 합의엔 이르질 못했다. 정략의 의도가 너무 컸기 때문"이라며 "그 후엔 모두가 손을 놓다 보니 이제는 각 정당마다, 각 정파마다 개헌 셈법이 제각각이다. 그렇다면 이번에도 변죽만 울릴 가능성이 높아졌다"고 분석했다. 박 평론가는 "어쩌면 (여권에서) 지금의 위기를 타개하기 위한 ‘국면전환용’으로 개헌을 말하는 것이 아닌지 의심스럽다. 개헌에 대한 시대적 통찰은커녕 당리당략의 셈법이 강하기 때문"이라며 "차기 대선 전에 개헌을 하는 것은 이미 물 건너갔다"고 단언했다.
국민 여론은 '차기 정부 개헌 적용' '내각제보다 대통령제 선호'
《동아일보》 신년 여론조사에서 개헌에 찬성하는 비율은 적극 찬성(18.7%), 다소 찬성(39.2%)을 합쳐 57.9%였다. 반대하는 의견은 매우 반대(10.0%)와 다소 반대(18.7%)를 합쳐 28.7%로 나타났다. 개헌 시기와 관련한 질문에는, 차기 정부가 출범한 직후 개헌해 차기 정부에서 적용을 시작해야 한다는 답변이 34.8%로, 현 정부에서 개헌해 차기 정부부터 적용하자는 응답(29.2%)보다 5.6%포인트 높았다. 바람직한 대한민국의 권력 구조가 무엇인지 묻는 질문에는 28.8%가 대통령 중임제, 23.8%가 현 제도인 대통령 단임제를 택했다. 이어 분권형 대통령제(15.8%), 의원내각제(13.6%) 순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