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정희 대통령 생가에 있는 박 대통령 동상(위)과 '박정희대통령역사자료관' 내부 모습. 사진=조선일보DB, 구미시 제공

박정희 대통령의 공적을 조명하고 그의 유품 등을 전시하는 '박정희대통령역사자료관'(이하 자료관)이 6월 30일 예비 개관을 거쳐 오는 9월 경북 구미시에서 공식 개관한다.

지난달 18일 구미시는 최근 자료관 운영위원회를 열고 전시 콘텐츠 미비, 코로나19 확산 등으로 2차례 개관이 연기됐던 자료관을 정식 개관하기로 결정했다. 시는 작년 10월 초대 관장 인선을 마친 데 이어 콘텐츠 확보까지 마무리해 현재 개관 준비를 끝낸 상태다. 장세용 구미시장은 "자료관이 어르신들에게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옛 향수를 느끼게 하고, 청소년들에겐 구미 근현대 역사와 산업화 과정을 배울 수 있는 교육 공간으로 자리매김했으면 한다"며 "박 전 대통령 생가와 자료관, 새마을테마공원을 연계해 (박 대통령 기념 코스가) '지역 대표 관광 자원'이 될 수 있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3층 규모 자료관, 朴 대통령 유품 5670점 수장고에 보관

사업비 159억 원을 투입, 구미 상모사곡동 박 대통령 생가 주변 4358㎡ 부지에 3층 규모로 건립된 자료관은 유품 5670점을 보관하는 수장고 및 상설·기획전시실로 구성됐다. 수장고는 지하 1층, 전시실과 사무공간은 지상 1층과 2층에 배치됐다. 전시실은 '조국 근대화의 길'이라는 주제로 조성됐고, '우리나라 체육의 역사' 등 다채로운 주제의 특별전시회도 수시로 개최된다. 자료관에 전시되는 박 대통령의 유품은 개인적으로 소장한 가구류·기록물·기념품·미술품·공예품·생활용품·사무용품부터 외국 정상이나 국내외 기관 등에서 받은 선물까지 다양하다.

조갑제 전 《월간조선》 대표 겸 편집장이 저술한 책 《朴正熙의 마지막 하루》에는 박 대통령의 집무실에 대한 묘사가 나온다. "박정희의 집무실은 서재로 불리기도 했다. 그는 군인 출신이었지만 책 속에서 살았다. 이 서재 겸 집무실에는 약 600권의 책이 꽂혀 있었는데 소설이나 수필집, 시집은 단 한 권도 없었다. 세계대백과사전, 파월한국군전사, 난중일기, 박정희 대통령(중국어 판), 불확실성의 시대, 감사원 결산 감사 보고서, 성경, 성경사전, 최수운 연구, 단재 신채호 전집, 백두진 회고록, 지미 카터 자서전, 자본론의 오역(일어판), 김일성(일어판), 사상범죄론, 한국헌법, 다국적기업, 정경문화(잡지).......

'실용서 다수' 박정희 서재

《암살사 연구》란 책도 있었다. 박종규 경호실장 시절인 1973년에 경호실의 연구발전실에서 펴낸 상하권으로 된 책이었다. 세계 각국의 암살 사례를 분석, 암살을 예방하는 방법을 개발하자는 취지로 쓰인 책이었다.

이 도서목록이 풍기는 분위기는 실용주의자의 그것이었다. 관념적인 것과는 거리가 먼 실무적이고 물질적인 소재로 꽉 차 있었다."

동서문화사에서 발간한 책 《하면 된다! 떨쳐 일어나자》에는 박 대통령의 조국 근대화 철학을 살펴볼 수 있는 그의 글들이 담겨 있다. 5.16에 대한 박 대통령의 신념은 이러했다.

"5.16 군사 혁명의 핵심은 민족의 산업 혁명화에 있었다는 것을 재강조하고 싶다는 것이다.

물론 이 5.16 혁명의 본령이 민족 국가의 중흥 창업에 있는 이상 여기에는 정치 혁명, 사회 혁명, 문화 혁명 등 각 분야에 대한 개혁이 포함되어 있지 않았던 것은 아니나, 그 중에도 본인은 경제 혁명에 중점을 두었다는 말이다.

먹여 놓고, 살려 놓고서야 정치가 있고, 사회가 보일 것이며, 문화에 대한 여유가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5.16, 경제 혁명에 중점 뒀다"

또한 이 경제 부문에 희망이 없다면, 타 부문이 개혁되고 온전히 나갈 리가 없다는 것도 당연한 말이다.

되풀이되는 말이 되겠으나 이 경제 재건 없이 적을 이길 수도 없고, 자주 독립도 기약할 수 없는 일이다. 경제는 참으로 다루기가 어렵다. 지식만으로, 열의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내버려둘 수도 없는 일이 아니겠는가.

우리는 싸워서 이겨내야 한다.

이 싸움에서 이기면 살고, 지면 이젠 영영 죽는 도리밖에 없다. 5.16 혁명이 '국민 혁명'으로, 국민 혁명이 민족의 '산업 혁명'으로 다시 진전되어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또 다른 대목에서 박 대통령은 민족중흥을 위한 당대 한국민의 자력갱생을 촉구했다. "괴로울 것이다. 지치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사활을 건 이 엄숙한 현실은 외면할 수가 없는 것이 아닌가.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 수행에 따른 국민의 괴로움이나 그 지침도 이만저만이 아닐 것이다. 본인은 그것을 모르는 바 아니다. 우리 한국은 20대의 청년이다. 젊은 때 고생은 사서라도 한다는 우리의 속담이 있다. 젊은 한국은 이만한 고생은 사서라도 얻어야 한다. 그만큼 가난하고 억눌려 온 지난날 우리는 곧잘 고생을 참아 왔다. 평생을 이만한 고생을 그대로 지속할 것인가, 아니면 좀 더 고생을 자원하여 후일의 안락을 기할 것인가.

"젊은 한국, 이만한 고생은 사서라도 얻어야"

답은 스스로 나올 것이다.

제1차 5개년계획, 그 다음에는 더욱 고생이 되더라도 의당 제2차, 제3차 5개년계획을 수행하지 않으면 후일의 안락은 있을 수 없다. 자손들을 위한 유산은 도저히 남겨 줄 수 없는 일이다."

책 《한국 국민에게 고함》에서 박 대통령은 재임 당시 경제 개발상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근면, 검소, 저축을 행동 강령으로 삼아, 온 국력을 총동원했던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은 의존과 빈곤으로 얼룩졌던 이 나라에 자립과 번영의 터전을 마련했습니다. 보잘것 없는 촌락이던 많은 고장이 공장들이 들어선 공장 지대로 발전해 가고 있으며, 수십 만 정보의 바다를 메워 논을 만들었고, 산을 깎아 밭을 만들었습니다. 그리하여 식량, 비료, 석탄, 시멘트, 정유, 전력 등 주요 물자의 대부분을 우리 손으로 만들어 쓸 수 있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공업 제품을 비롯한 수많은 우리의 상품이 세계 백여 개 나라로 뻗어 나가, 작년도 우리의 상품 수출고는 4, 5년 전에 비해 열 배가 넘는 2억 5천만불에 달하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극복할 수 없을 것처럼 보이던 난관을 끝내 극복하였고, 제한된 자원으로 많은 성과를 올렸으며, 서구의 선진국 전문가들이 불가능하다고 한 그러한 어려운 환경 속에서, 바로 그 서구의 선진 공업 기술을 습득하여 그들과 겨루려고 하고 있습니다.

"한국의 발전상, 우연한 기적 아닌 국민의 검소와 근면의 결정"

오늘날 많은 외국인들은 '한국에 기적이 일어나고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기적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실로 잘살아 보겠다는 의욕과 희망을 가지고 인내와 용기로써 온갖 역경과 난관을 이겨낸 우리 국민의 근면, 검소, 저축의 결정인 것입니다."

《朴正熙의 마지막 하루》는 박 대통령의 10.26 서거를 이렇게 조명한다. "궁정동에서 박정희가 보여 준 최후의 모습이 바로 그의 뒷모습일 것이다. 박정희의 뇌리에 마지막으로 남은 영상은 아마도 소복 입고 손짓하는 육영수였을 것이다. 가난과 망국과 전란의 시대를 살면서 마음속 깊이 뭉쳐 두었던 한의 덩어리를 뇌관으로 삼아 잠자던 민족의 에너지를 폭발시켰던 사람. 쏟아지는 비난에 대해서는 "내가 죽거든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면서 일체의 변명을 생략한 채 가슴을 뚫리고도 '체념한 듯 담담하게'(신재순 증언) 최후를 맞은 이가 혁명가 박정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