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5월 23일)은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서거한 지 12주기가 되는 날이다. 노 전 대통령의 묘소(墓所)가 있는 경남 김해 봉하마을에서 추도식이 열렸다. 추도식의 주제는 ‘열두 번째 봄, 그리움이 자라 희망이 되었습니다.’ 김부겸 국무총리, 이철희 청와대 정무수석, 송영길 더불어민주당 대표, 김기현 국민의힘 대표 권한대행, 유시민 노무현재단 이사장 등이 참석했다. 김 총리는 추도사(追悼辭)에서 “바보 노무현의 삶처럼 분열과 갈등을 넘어 국민통합과 사람 사는 세상을 만들기 위한 희망을 놓지 않겠다”고 말했다.
문재인 정권은 김대중-노무현에 이은 ‘민주정부 3기’, 참여정부의 국정이념을 계승한 ‘제2의 노무현 정권’을 자임(自任)한다. 대통령부터가 노 전 대통령의 수석비서관·비서실장을 지낸 최측근 출신이다. 정계 입문 전에는 부산 등지에서 노 전 대통령과 ‘인권변호사’ 활동을 함께한 ‘노무현의 친구’다. 문 대통령은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한 노 전 대통령을 기억하고 그리워하며 그의 정치적 목표를 자신 임기 내에 실현하고자 노력했다. 노 전 대통령이 꿈꿨던 ‘반칙과 특권 없는 세상’을 이루기 위해, 우리 사회에 ‘공정-평등-정의’의 가치를 구현하고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나라’를 만들겠다고 공언(公言)했다.
그러한 현 정권이 최근 들어 ‘노무현 정신을 배반했다’는 쓰라린 지적을 받고 있다. 다른 비판도 아닌 ‘노무현 배신’이라는 일갈(一喝)은 현 정권에 정치적 내상(內傷)을 일으켜 정통성을 위태롭게 하는 가장 치명적인 지적일 수밖에 없었다. 특히나 이러한 유의 지적은 주로 과거 노무현 정부에 참여했던 ‘노(盧)의 측근’과 진보진영의 대표적 지식인으로부터 나왔다. 두 정권을 밀접한 거리에서 모두 경험해본, 소위 ‘같은 편’ 인사들이 “노무현을 배신한 문재인 정부”라며 ‘강력 질타’하고 나선 것이다. 현 정권이 이런 치명적 비판을 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1. 분열의 정치: 자기 패거리들만을 위한 ‘마이 웨이’... 국민을 두 동강 냈다
2002년 대선 당시 노 전 대통령 대선 캠프에서 좌장(座長) 격으로 활동했던 염동연 전 열린우리당 최고위원은 회고록 《둘이서 바꿔봅시다!》 출간 관련 지난 19일 《조선일보》 인터뷰에서 “(현 정권이) ‘노무현 정신’을 이어받겠다더니 오히려 지역주의를 조장하는 식의 정치를 하고 있다. 2019년 연동형 비례대표제 도입을 위한 선거 제도 개편 또한 자신들 정치적 이익을 위한 것으로 변질시키지 않았나”라며 “(민주당은) 국회에 180개 가까운 의석을 갖고 있으면서도 국가의 미래에 대한 중대 과제를 실현할 의지는 전혀 보이지 않고 자기 패거리들만을 위한 ‘마이 웨이’를 거듭하고 있으니 안타깝다”고 비판했다.
1990년 노무현과 함께 ‘3당 합당’을 거부한 동지(同志)이자 여권의 원로로 꼽히는 김정길 전 행정자치부 장관은 지난 3월 13일 《조선일보》 인터뷰에서 “대통령이 됐으면 자기 소신을 갖고 국정을 운영해야 하는데, 그게 지금 안 되고 있다. 정말로 역사에 남을 훌륭한 대통령이 될 거라고 믿었는데 안타깝다”며 “만나는 사람마다 문 대통령을 비판하니 듣고 있기가 괴롭다”고 털어놨다. 김 전 장관은 “자기가 모셨던 노무현이 대통령이 되고도 고초 겪는 걸 봤으니 제대로 할 거라 믿었다. ‘과정은 공정하고, 결과는 정의로울 것’이라는 취임사에도 감동했다”며 “그런데 대통령이 된 지 4년이 다 돼가도록 취임사가 하나도 지켜지지 않더라. 국민 화합 실패하고, 국민을 네 편과 내 편으로 두 동강 냈다”고 질타했다.
참여정부 법무장관을 지낸 강금실 전 장관은 지난 22일 《조선일보》 인터뷰에서 “(민주당 내에서 친문 지지자들에게) 문자 폭탄을 받는 사람이 그걸 위협적이라고 느끼면 폭력”이라며 “나는 그게 노무현 대통령의 사망에 따른 트라우마에서 시작했다고 본다. 그러나 그것을 문자 폭탄 같은 형태로 표출해선 안 된다”고 현 집권세력 강성 지지자들의 행태를 지적했다. 강 전 장관은 “민주주의는 토론을 보장하는 것, 틀린 말을 참고 듣는 것이다. 더구나 문재인 대통령이 집권한 상황”이라며 “강자의 행동이라고는 볼 수 없다. 민주당 권리당원들끼리도 좀 더 대화가 필요하다고 본다”고 제언했다.
2. 원한의 정치: 노무현 지키지 못했다는 트라우마... ‘한풀이 정치’로 끝난 검찰 개혁
노무현 청와대 홍보수석을 지낸 조기숙 이화여대 교수는 지난 3월 31일 페이스북에 올린 글에서 “‘명분 있는 승리가 가장 좋지만 패하더라도 명분 있게 패해야 한다. 그래야 차후를 도모할 수 있다. 가장 나쁜 게 명분 없는 패배이다.’ 이게 바로 노무현 정신”이라며 “제 눈에는 이번 (보궐)선거에서 민주당이 이길 확률이 거의 없는데도 불구하고 ‘명분 없는 패배’로 가는 게 보였고, 그것만은 막고 싶었다. 민주당 혹은 문 대통령의 극렬 지지자들의, 생각이 다른 사람에 대한 막말과 비난, 훈계질이 도가 넘었다고 생각한다”고 비판했다.
조 교수는 “아직도 문 대통령이 ‘왕따’라고 생각해 언론과 검찰에 의해 할 일을 못한다는 분노를 가졌다면 자신의 판단력을 돌아봐야 한다고 생각한다”며 “노무현을 지키지 못했다는 지지자의 트라우마 이해한다. 하지만 부모의 트라우마가 자식을 망치듯이, 지지자의 트라우마도 지도자를 잘못된 길로 이끌 수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참여정부의 다수 정책은 진보색은 띠었지만 정파적이지 않았고, 국가 전체의 미래를 내다보고 만들었다. 노무현이 재평가 받는 가장 큰 이유”라며 “(현 집권세력도) 잘못한 건 구체적으로 뭘 잘못했고, 어떻게 정책을 수정할 것인지 약속하시라. 여기서 밀리면 끝장이라며 조국 수호하다 지금 사태가 벌어진 것”이라고 일침을 가했다.
강준만 전북대 교수는 저서 《싸가지 없는 정치》에서 “문재인 정권이 노무현 정권의 ‘실패’에서 배워야 할 점이 바로 이것이었건만, 배움은 없었다. 오직 ‘(검찰은) 노무현을 죽인 악마’라는 감정적 프레임으로만 밀어붙임으로써 민심을 잃고 정권 스스로 적폐의 대열에 한 발 들이미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이게 바로 ‘싸가지 없는 정치’의 비극”이라며 “문 정권이 생각한 검찰 개혁과 일반 국민이 생각한 검찰 개혁은 같은 게 아니다. ‘살아 있는 권력의 비리도 엄정하게 수사하라’는 문재인의 주문은 정권에 타격을 주지 않는 선에서 하라는 것이었으며,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이런 주문은 역대 권력자들도 했던 것”이라고 지적했다.
강양구 TBS 과학전문기자는 일명 ‘조국 흑서’로 불리는 책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나라》에서 “노무현 대통령 트라우마가 한국 정치에 미친 폐해는 넓고 깊다. 한때 노무현 정부의 실정에 책임을 지고서 스스로 ‘폐족’이라고 낮췄던 이들이 별다른 자기반성 없이 노무현 대통령의 비극을 딛고서 부활했다”며 “노무현 대통령 트라우마로 연명하는 정치 세력은 유능하지도 못했다. (문재인 정부의) 인사의 대부분은 노무현 정부에서 일했던 이들의 돌려막기인 경우가 많았고, 그나마 성공적인 경우는 드물었다”고 평가했다. 강 기자는 “촛불이 기대했던 개혁은 지지부진했고, 그나마 기대를 걸었던 남북 관계도, 코로나19 방역도 한계가 또렷해 보인다. 그나마 눈에 띄는 게 마치 박근혜 정부가 했던 것과 비슷한 한풀이 정치”라며 “트라우마를 동력 삼아 움직이는 정치는 결코 건강할 수 없다. 문재인 대통령 또 조국 전 장관의 열성 지지자가 저토록 보통 사람의 상식으로는 이해가 안 갈 정도로 내 편/네 편을 가르고, 상대방을 악마시하는 것이야말로 그 결과”라고 지적했다.
3. 위선의 정치: ‘자유와 참여’ 외친 노무현 對 ‘국민의 권리’ 뺏은 문재인
노무현 정부 당시 청와대 정책실장과 교육부총리를 지낸 김병준 국민대 명예교수는 작년 3월 13일 ‘데일리안’ 인터뷰에서 “노무현 대통령은 분권과 자유를 외쳤는데 문재인 정부는 국가주의적 정책으로 시민의 사소한 생활까지 감시하고 있다. ‘조국 사태’에서 보여준 위선과 준연동형 비례대표제 위성정당 파동이 보여주는 기만의 문제는 또 어떠냐”라고 지적했다.
노무현 정부를 지지하는 등 과거 진보 성향이었던 노정태 철학 에세이스트는 《신동아》 2021년 1월호 그룹 인터뷰에서 “노 전 대통령이 자신을 지지하는 인터넷 사이트에 직접 댓글을 단 적이 있다. 체통도 그렇거니와 너무 노골적으로 정치편향 행위 아니냐고 막 화를 내는 사람들이 있었다”며 “(그러나) 돌이켜보면 진짜 ‘인터넷 대통령’이었던 거다. (반면) 지금 문재인 대통령은 국민에게 완전히 사라진 존재가 됐다”고 꼬집었다. 그의 말이다. “한미 FTA와 이라크 파병에 참여함으로써 한국이 얻은 건 무엇이고 잃은 건 무엇인지 논하면서 노무현 시대를 이해해야 하는데, 노무현의 상징자산을 통째로 갖고 있는 사람들이 이를 회피하죠. 우파는 노무현을 입에 담고 싶어 하지도 않으니 얘기하지 않고, 좌파는 노무현을 보수정치의 희생양으로만 만들고 싶어 하니 얘기하지 않아요.”
진중권 전 동양대 교수는 작년 2월 5일 페이스북에 쓴 ‘문재인은 노무현을 어떻게 배신했나’라는 제하의 글에서 이렇게 말했다.
“문재인 정권은 검찰 개혁의 명분을 모조리 배신했습니다. 이게 ‘개혁’인가요? 이 정권 하에서도 검찰은 죽은 권력에는 날카로운 칼을 대고 피의사실도 공표했지만, 산 권력에는 제대로 칼을 들이댈 수 없었습니다. 입으로는 ‘검찰 개혁’한다고 떠들면서 몸으로는 자신들이 내세운 명분들을 빠짐없이 배반해 온 것이 문재인 정권입니다. 이게 과연 노무현 대통령이 원하던 세상일까요?
노무현 대통령의 꿈을 이루고 그의 한을 푼다는 명분으로 이들이 무슨 짓을 했을까요? 실제로는 참여정부에서 도입한 제도나 성취를 무로 되돌리는 일만 골라서 해왔습니다. 예를 들어 ‘법무부 장관이 검사의 보직을 제청할 때 검찰총장의 의견을 청취한다’는 규정(검찰청법 제34조 제1항). 이는 참여정부 때에 명문화한 조항인데, 추미애 장관이 일방적으로 무력화시켜 버렸습니다. 또 국회의 요청에 따라 중요한 사건의 공소장을 국회에 제출하도록 한 ‘국회증언감정법’의 규정. 이는 ‘국민의 알 권리’ 보장을 위해 참여정부 시절에 도입되어, 참여정부 사법 개혁의 대표적 업적으로 꼽혀왔던 조항입니다. 그런데 이 역시 추미애 장관이 독단적으로 무시해 버렸습니다. 참모들이 반대하는데도 “내가 책임을 지겠다”며 비공개 방침을 밀어붙였다고 합니다.
노무현 정부가 ‘참여정부’를 표방한 것은 수평적 소통으로 연결된 시민들의 참여 위에 서 있는 정부가 되고 싶었기 때문이겠죠. 그런데 시민의 참여에 필수적인 것이 바로 ‘정보’입니다. 뭘 알아야 ‘참여’도 할 거 아닙니까? 참여정부에서 공소장을 공개하게 한 것은 국민의 ‘알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런데 문재인 정권은 노무현 정권이 국민에게 준 그 권리를 다시 빼앗았습니다.
문재인 지지자들을 보세요. 선동가들이 프로그래밍 한 매트릭스에 갇혀 잠을 자고 있죠. 자기들이 ‘깨어있다’고 잠꼬대 하다가 권력이 신호를 주면 몽유병이 걸린 듯 잠결에 우르르 서초동으로 몰려가죠? 저게 노무현 대통령이 말한 ‘깨어있는 시민’의 모습입니까? ‘대가리가 깨져도 문재인’이라 되뇌는 좀비들. 이 정권은 대통령이 ‘양념’이라 부르는, 이 좀비들의 폭력적 행동 위에 서있습니다.
문재인은 노무현이 아닙니다. 두 분은 애초에 지적 수준과 윤리적 지반이 다릅니다. 문재인 정권은 노무현 정권이 아닙니다. 노무현 정권을 계승한 정권이라 할 수도 없습니다. 두 정권은 아예 차원이 다릅니다. 철학과 이념이 서로 상반됩니다. 문재인은 노무현을 배반했습니다. 문재인 정권은 노무현 정신을 배반했습니다. 철저히, 아주 철저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