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얀마 군 쿠데타를 주도한 민 아웅 흘라잉. 사진=연합뉴스TV 캡처

지난 2월 1일 미얀마에서 군부(軍部) 쿠데타를 주도한 민 아웅 흘라잉 미얀마군 최고 사령관에게 세계의 이목이 쏠리고 있다. 흘라잉 사령관이 주축이 된 미얀마 군부는 작년 11월 문민정부 하에서 치른 총선(總選)이 ‘부정선거’였다고 주장하며 계엄령을 선포하고 군정(軍政)을 개시,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민들을 탄압하며 넉 달간 유혈사태(流血事態)를 지속하고 있다.

흘라잉 사령관은 지난 4일(현지 시각) 밤 군부 매체 ‘미야와디TV’를 통해 방영된 홍콩 ‘봉황TV’ 인터뷰에서 “(시민들의) 저항이 이 정도일 줄은 생각하지 못했다. 저항이 격렬할 것으로 예상하지 못했다”며 “다만 사람들이 감정적으로 될 수는 있겠다고 생각했다. 시위대 중 일부는 법적 처벌을 받을 수 있다는 점을 두려워하는 부정직한 사람들”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또 군부의 압제(壓制)로 7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숨졌다는 지적에 “(이를) 입증할 어떤 증거도 없다. 실제 사망자는 300명 정도”라고 반박했다. 

흘라잉 사령관은 가택연금(家宅軟禁) 상태로 억류된 아웅산 수치 국가고문의 재판과 관련해서도 “수치의 건강에 문제는 없다. 수일 안에 재판을 받으러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수치 고문과 윈 민 대통령 등 문민정부의 집권 기반인 민주주의민족동맹(NLD) 인사들은 쿠데타 발발 직후 구금됐다. 수치 고문은 지난달 24일 수도 네피도 특별법정에 출석, 변호인단을 통해 “NLD는 국민을 위해 창당됐기 때문에 국민이 있는 한 존재할 것”이라고 저항 메시지를 냈다.

미얀마 군부의 수장(首長) 흘라잉 사령관은 1956년 미얀마 타닌따리에서 태어나 국방사관학교와 국립국방대학을 졸업, 1977년 임관 이후 삼각주(州) 사령관과 합동참모본부장 및 5성 장군을 거쳐 현 최고사령관까지 오른 정통 군부 출신이다. 작년 총선에서 군부 정당인 ‘연방단결발전당’이 대패(大敗)하자 역심(逆心)을 품고 쿠데타를 주도, 10년간 지속돼 온 문민정부를 전복시키고 대권(大權)을 장악했다.

“軍 최고 지도자지만 절대 권력자는 아냐... 차기 대통령 욕심으로 쿠데타 자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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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흠 전 미얀마 대사(좌)와 민 아웅 흘라잉 미얀마 군 사령관. 사진=조선일보DB, BBC 캡처) 

이와 관련 이주흠 전 주(駐)미얀마 한국 대사(大使)(전 외교안보연구원장)는 최근 《조선펍》과의 전화 인터뷰에서 “흘라잉은 차기 대통령에도 욕심이 있었다고 한다. 쿠데타 또한 (흘라잉의) 개인적인 권력욕에 의해 일어난 것”이라며 “군 최고위직까지 올라간 사람이긴 하지만 (과거 네 윈 등 미얀마 군부 지도자들처럼) 절대 권력자는 아니다. 군부 내에서 개인적인 정치적 카리스마를 쌓아 올린 인사가 아니다”라고 평가했다. 

이 전 대사는 “군부의 정점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힘을 행사한 것이기 때문에 (정치적 카리스마를 발휘한) 일반적인 독재자들과는 다르게 개인적인 위상이 낮다”며 “(오히려 그가 군부 내에서) 절대적인 힘을 행사하지 못할 수도 있다. (군부와 시민들 간 투쟁의 경우) 상황을 두고 봐야 한다”고 진단했다.

“미얀마 軍 가부장적이지만... 흘라잉 권력욕에 군부 내부 동요 가능성”

이 전 대사는 “미얀마 군부는 다른 나라들처럼 청년 장교들이 개혁 지향적으로 운동을 펼치는 게 아니라, 철저하게 가부장적(家父長的)이다. 위에서 시키면 무조건 따르는 식”이라며 “그렇지만 이번 쿠데타는 흘라잉의 개인적인 권력욕 때문에 벌어졌기 때문에 (갈수록 유혈사태가 격화되면 군부) 내부적으로 어떤 동요가 있을 수 있다. (흘라잉을 제쳐두고라도) 군부가 자기의 기득권을 근본적으로 위협받지 않는 한 (시민정부와의) 타협도 가능하다”고 전망했다.

이 전 대사는 “(지난날) 아웅산 수지의 민정(民政)도 군부와 일종의 타협을 통해서 이뤄진 게 아닌가”라며 “(타협이 됐든 투쟁이 됐든) 양측의 일진일퇴(一進一退)는 있겠지만, 결국에는 민주화 쪽으로 갈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자유의 맛을 본 국민들이 ‘노상강도(路上强盜)’처럼 권력을 납치해간 군부를 그냥 두고 보겠는가. 군부가 이 사태를 일시적으로 진압하고 권력을 유지할지 몰라도, 결국에는 민의(民意)가 이기지 않겠는가”라고 분석했다. 그의 말이다.

“자유를 맛보다 빼앗긴 시민들, 저항으로 끝내 國民主權 되찾아올 것”

“우여곡절은 있고, 일진일퇴도 있겠지만... 결국 (미얀마 시민들이) 국민주권(國民主權)을 되찾아 올 겁니다. 누구도 미얀마 국민이 이렇게까지 저항할 기력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잖아요. ‘8888 항쟁’(1988년 8월 8일 일어난 反군부 민중항쟁. 새로운 군부의 집권으로 시민 등 수천 명이 희생된 사건)의 충격, 군부에 무자비하게 당한 기억 때문에 (미얀마 시민들이) 저항 의지를 상실하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도 들었지요... 그러나 이번 사태를 보면서 ‘국민들이 저항을 만만치 않게 하고 있다’는 생각도 들고, 그래서 군부 내에서도 동요가 없을 것 같지 않다는 생각이 듭니다. 개방 사회의 자유라든지, 민주주의라든지, 그게 편린(片鱗)에 불과하더라도 그것들을 맛보다가 빼앗겼을 때 시민들의 저항 의지는 더욱 커지는 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