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2년 대선 특별기획-기적의 나라 대한민국, 7인의 대통령’(정치 카페 하우스, 하태경 국민의힘 의원, 조정훈 시대전환 의원 공동 주최) 제2차 강연이 14일 오후 7시 서울 여의도 정치 카페 하우스(HOW’S)에서 열렸다.
연사로 나선 전상인 서울대 환경대학원 교수는 ‘박정희와 대한민국 압축·복합 근대화 혁명’이란 주제로 강연했다. 토론은 김도연 시대전환 상임대표당원, 사회는 조정훈 의원이 맡았다.
전상인 교수는 “역대 대통령 인기 순위를 조사해보면 박정희 대통령은 거의 1, 2위에 속한다”며 “시대가 흘러 가끔 2위를 할 때도 있지만 부동의 1위라고 봐도 무방할 것”이라며 말문을 열었다.
전 교수는 “박 대통령은 전형적인 흙수저, 빈농 출신으로 가난에 대한 분노가 컸던 분이고 어쩌면 일평생 가난과의 전쟁을 벌이셨던 분이었다”며 “일제 시대에 성장했기에 어렸을 때부터 부국강병에 대한 열망도 갖고 계셨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박정희는 대통령이 되기 전 직업이 ‘직업 교사’와 ‘군인’이었다. 교사는 기본적으로 사람을 지도하고 가르치려고 하고, 군인은 통치적 관점과 전략적 사고를 갖게 된다”며 교사와 군인으로서의 경험과 정체성이 그의 통치 전반에 영향을 미쳤다고 설명했다. 또한 “박정희는 남로당 전력을 가진 군내 비주류 엘리트로서, 그런 배경이 강한 권력의지를 추구하게 했던 것 같다”고 했다.
전 교수는 박정희의 눈에 띄는 배경 중 하나가 ‘만주국에서의 경험’이었다고 말했다. 그의 근대 국가 건설에 일본의 ‘메이지 유신’은 간접 경험이었지만, 청년 시절의 만주국 경험은 실제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 전 교수의 분석이다.
“그 당시 만주국은 ‘동양의 서부’, ‘아시아의 엘도라도’라고 불렸어요. 말하자면 황금의 나라. 20세기 전반기에 국적을 불문하고 청년들, 야심가들이 꿈을 실현하기 위해 몰려들었던 곳, 약속의 땅으로 여겨졌던 게 만주였거든요. 경제개발 5개년 계획, 도시 계획, 도로 건설, 식량증산계획 등이 당시 만주국에서 실행됐던 개발 정책이었어요.”
이승만-박정희-노무현으로의 세대 교체... 그다음은 이준석?
전 교수는 “박 대통령은 1917년생이고 이승만은 1875년생으로 무려 42년 차이가 났다. 이승만은 조선시대 사람이었고, 박정희는 일제시대 사람이었다”며 “그다음이 해방 이후 세대인 노무현이었고 이준석 대표가 그다음 세대쯤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는 “한국 정치에는 연배주의, 동년배주의라는 게 있어서 한번 세대가 점프하면 뒤로 가는 게 쉽지 않다”며 “크게 보면 이승만 시대에서 박정희 시대로 점프했고, 노무현 시대에 와서 586세대가 한 시대를 풍미했고 이제 새로운 시대가 오는 게 아닐까 추측해본다”고 했다.
전 교수는 “박정희 대통령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대한민국의 압축·복합 근대화 혁명을 이룬 지도자로 정의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박정희의 근대화 과정을 설명하기에 앞서 근대화(modernization)의 정의와 역사에 대해 상세히 설명했다. 전 교수의 강연 내용이다.
“근대화(modernization)를 현대화로 번역하면 틀린 말이다. 근대화는 유럽에서 16세기 이후에 나타난 사회 변동을 말한다. 근대화는 포괄적이고 불가역적이다. 인류 역사는 근대화 이전과 이후로 구분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근대화는 ‘좋다’, ‘나쁘다’라는 가치 개념이 아니다. 가치 중립적인 개념으로 폭력적 측면, 안 좋은 측면도 있었다. 빛과 그림자를 동시에 갖는 것이다. 그러나 인류의 삶을 혁명적으로 바꾼 계기가 됐고, 싫든 좋든 근대화 이전으로 돌아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근대화는 세계를 한 바퀴 돌고 있다. ‘근대화의 세계화’라고도 표현할 수 있는데, 근대화는 하나의 ‘시대 정신’이고 ‘세계의 역사적 프로젝트’일지도 모른다. 근대화는 시기(時期)의 문제이지 선택의 대상이 아니다. 근대화를 피하려고 하면 근대화에 결국 먹히고 만다.”
전 교수는 ‘근대화 과정’을 연구한 미국의 정치사회학자 배링턴 무어의 이론을 소개했다. 무어는 근대화의 세 갈래가 ‘부르주아 혁명과 자유민주주의’, ‘위로부터의 혁명과 파시즘’, ‘농민혁명과 공산주의 농민혁명’이라고 봤다.
시대가 흐름에 따라 ‘파시즘’과 ‘공산혁명’의 한계가 드러났고, 무어의 이론을 뛰어넘고자 하는 근대화 이론들이 등장했다. ‘자생적 근대화, 자주적 근대화’, ‘식민지 근대화’, ‘제3세계 캐치업(catch-up) 근대화’, ‘중국식 붉은 자본주의 근대화’ 등이 이에 속한다.
“영국이 250년, 미국이 100년 걸린 것을 한국은 단 40년 만에 해냈다.”
전 교수는 “한국은 ‘제3세계 캐치업 근대화’에 해당한다”며 “후발 주자였지만 근대화된 국가들을 뒤좇아 갔고 근대화에 성공한 국가가 됐다”고 설명했다. 그는 한국의 근대화 과정을 ‘근대화 혁명’, 세기를 뛰어넘은 ‘압축 근대화’로 정의했다.
그는 한국의 압축 근대화를 극찬했던 현대 경영학의 아버지 피터 드러커의 말을 전했다.
“6·25전쟁이 끝난 직후 한국을 처음 방문했다. 당시 한국은 농업사회였고 교육은 엉망이었다. 10년 전 다시 방문했을 때 한국은 철저한 산업사회로 변했고 빠르게 지식사회로 가고 있었다. 영국이 250년, 미국, 독일, 프랑스가 80∼100년 만에 이뤄낸 것을 한국은 단 40년 만에 해냈다. 역사상 드문 경우다.” (2004년, 피터 드러커)
전 교수는 박정희를 ‘복합 근대화’, 시대적 대전환(The Great Transformation)을 이룬 지도자로 평가했다. 그는 “박정희는 대한민국 근대화 혁명의 총괄계획가(MP, Master Planner)였다”며 “비전을 가진 미래지향적 지도자였고, 종합적인 안목을 가졌으며, 전문적인 지식을 갖춘 전략적 지도자였다”고 말했다.
그는 “5.16에 대한 정의를 물으면 정치인들이 똑바로 답하지 못하는 경우를 많이 봤는데 나에게 5.16이 무엇이냐 묻는다면 ‘5.16 당일은 쿠데타, 통치 18년은 혁명이었다’고 정의할 것”이라고 밝혔다.
전 교수는 “현재 시점에서 과거를 보면 너무나도 당연해 보이고 평가하기도 쉽다. 그러나 당시의 눈으로 보면 전혀 다른 세계가 펼쳐진다”며 “당시의 시대적 관점에서 그 시대를 보면 새로운 것들을 발견하고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박정희 대통령 근대화 혁명의 10대 업적으로 ▲경제성장 ▲세계화 ▲체제 우위 입증 ▲정부 혁신 ▲공간 계획 ▲주거 혁명 ▲농촌 혁명 ▲의식 개혁 ▲과학·기술 혁명 ▲녹색 혁명을 꼽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