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2년 대선 특별기획-기적의 나라 대한민국, 7인의 대통령’(정치 카페 하우스, 하태경 국민의힘 의원, 조정훈 시대전환 의원 공동 주최) 제2차 강연이 14일 오후 7시 서울 여의도 정치 카페 하우스(HOW’S)에서 열렸다. 연사로 나선 전상인 서울대 환경대학원 교수는 ‘박정희와 대한민국 압축·복합 근대화 혁명’이란 주제로 강연했다. 사진=조선펍

‘2022년 대선 특별기획-기적의 나라 대한민국, 7인의 대통령’(정치 카페 하우스, 하태경 국민의힘 의원, 조정훈 시대전환 의원 공동 주최) 제2차 강연이 14일 오후 7시 서울 여의도 정치 카페 하우스(HOW’S)에서 열렸다. 

연사로 나선 전상인 서울대 환경대학원 교수는 ‘박정희와 대한민국 압축·복합 근대화 혁명’이란 주제로 강연했다. 토론은 김도연 시대전환 상임대표당원, 사회는 조정훈 의원이 맡았다.

이날 강연에서 전상인 교수는 “박정희 대통령을 한마디로 정의한다면 대한민국의 압축·복합 근대화 혁명을 이룬 지도자라 말하고 싶다”고 했다. 

전 교수는 박정희를 ‘복합 근대화’, 시대적 대전환을 이룬 지도자로 평가했다. 그는 “박정희는 대한민국 근대화 혁명의 총괄계획가였다”며 “비전을 가진 미래지향적 지도자였고, 종합적인 안목을 가졌으며, 전문적인 지식을 갖춘 전략적 지도자였다”고 말했다.

전 교수는 박정희 대통령 근대화 혁명의 10대 업적으로 ▲경제성장 ▲세계화 ▲체제 우위 입증 ▲정부 혁신 ▲공간 계획 ▲주거 혁명 ▲농촌 혁명 ▲의식 개혁 ▲과학·기술 혁명 ▲녹색 혁명을 꼽았다.

이하는 전상인 교수가 박정희 근대화 혁명의 10대 업적에 대해 강의한 내용을 요약 전달한다.

◇ 박정희 근대화 혁명 10대 업적

1. 경제성장

“‘계획 경제’와 ‘경제 계획’은 다릅니다. 경제 계획은 기본적으로 시장을 활용해서 경제 정책을 펼치는 거예요. 공산주의 국가에서 하는 것이 계획 경제이고요. 박정희 시대는 시장을 왜곡한 것이 아니에요. 오히려 시장이 없었던 시대에 국가가 시장을 만들었던 역설적인 상황인 거죠.

박정희 대통령은 국가 건설을 위해 차관을 빌리러 다녔고 일본의 팔을 비틀어서라도 돈을 타냈어요. 또 파병을 통해서도 외화를 벌어왔고요. 경제 개발을 주도하는 조직인 ‘경제기획원’을 만들어서 운영했습니다. 우연일 수도 있겠지만 경제개발 계획이 끝나고 경제기획원이 없어지는 김영삼 정부 들어 IMF를 맞게 됐어요.

박정희 대통령 재임 당시 GDP 연간 성장률은 1960년대가 8.5%, 돌아가시기 전까진 8.3%였어요. 박정희 시대에 노동자를 착취한 것이 아니라 그 노동자들 대부분 중산층으로 성장했어요. 한 나라의 노동자를 18년 동안 착취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2. 세계화

“조선시대에는 대륙에 속했던 국가가 이승만-박정희 시대를 거치면서 대륙에서 해양 문명으로, 글로벌 스탠다드로 편입됐어요. 이승만-박정희는 지도(地圖)를 보고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이었어요. 박정희 이후의 지도자들은 소위 ‘지도력(地圖力)’이 낮았다고 생각해요. 세계에서 강대국이 된 나라의 위인들은 지도를 보고 전략을 구상했지요.

박정희에게 만주국에서의 경험이 유효했고, 군인은 기본적으로 땅뺏기를 생각해야 하고 공간적 의사 결정을 하는 직업이다 보니 지정학적 사고를 했던 거예요. 또 때마침 1960년대에 미국 주도로 세계 자유통상이 확대됐어요. 1956년에 미국에서 컨테이너 박스가 만들어졌는데 혁명적인 발명품이었어요. 그 전까진 배에 많은 물건을 싣고 옮기는 데 제한이 있었거든요. 그런데 박정희 대통령이 수출을 해야겠다고 마음 먹었을 때 컨테이너 박스와 컨테이너 배가 만들어지고 컨테이너 시대가 열린 거에요. 당시 대한민국은 수출주도형 성장 정책을 펼쳤고 조선업을 시작하게 됐어요. 또 부산에 컨테이너 항구를 만들었고요. 북한에는 현재까지 컨테이너 항구가 하나도 없습니다. 게다가 그때가 냉전 시대였는데 중국이 ‘죽의 장막’을 치면서 세계 시장에 나오지 않았어요. 만약 당시 중국이 나왔다면 우리나라는 성장하지 못 했을 거에요. 축복이라는 게 아무한테나 오지 않아요. 두드리는 자에게 열리는 법이죠.

한국 사람이 언제부터 바깥 출입을 했나 생각해보세요. 첫째는 일제 시대였어요. 불행하지만 살기 위해서 만주로, 중국으로, 미국으로 나갔어요. 그게 한국 최초의 세계화였습니다. 두 번째가 박정희 시대의 수출주도형 경제 정책이었죠. 이때는 돈 벌러 해외에 나갔습니다. 셋째는 88올림픽 이후인데 이젠 해외에 놀러 나가게 된 겁니다.”

3. 체제 우위 입증

“박정희 시대에 와서 정통성 경쟁에서 체제 우위의 경쟁으로 바뀝니다. 공산주의 대 시장경제의 대결, 박정희는 우리 체제의 우월성을 입증했던 지도자였죠.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라는 유명한 책에서 남북한을 비교하는데 같은 민족, 같은 역사, 같은 말 가졌는데 왜 차이가 났느냐는 거죠. 바로 체제 차이가 남북을 갈랐던 거예요. 햇볕정책의 원조가 사실 7·4 남북공동선언의 박정희였어요. 체제 우월감, 자신감을 가졌던 거죠.”

4. 정부 혁신 

“우리나라는 박정희 시대에 들어서야 정부 조직을 정비하고 국가 건설을 완비했어요. 국가의 꼴을 제대로 만들었던 시절인 거죠. 근대 국가 운영 방식을 도입하고, 근대 공무원 제도가 시작됐어요. 당시 한국에서 가장 선진화된 조직이 군부였거든요. 미국에 가장 많이 유학을 갔던 것도 군인들이었고요. 그래서 미국의 선진 시스템이 군인들을 통해 도입됐던 거예요. 

1950년대 한국전쟁 이후 전북 임실에서 말단 공무원을 지냈던 분이 일기를 썼는데 최근에 이게 책으로 나왔어요.  《1950년대, 공무원 이강운의 삼계일기》. 당시 공무원은 지방에서 뭘 했을까요? 기본적으로 1950년대 우리나라 지방 공무원의 행태는 정약용의 목민심서에 나오는 조선 말의 관리들과 똑같았어요. 가끔 호적 대장, 토지 대장 떼주고 주민 노동력 강제 동원하면서 수탈했던 관료들. 

박정희 시대에 들어서 관료들이 기술 관료, ‘테크노크라트(technocrat)’로 바뀌기 시작해요. 박정희 정부는 공무원 월급을 단기간에 2배, 3배 늘려줘요. 수탈하지 말고 청렴하라는 의미에서였죠. 그리고 가끔 ‘숙정(肅正)’이라고 공무원 정화 운동을 했어요. 부정부패를 없애는 운동이었죠. 

그런데 오늘날엔 정치인과 공무원들이 공범이 되어 가는 것 같아요. 영국에선 고위 공직자들은 야근 수당을 받지 않아요. 내가 대영국의 공무원인데 일 좀 더 했다고 월급을 더 받느냐는 자부심에서 나오는 거죠. 1960-70년대 테크노크라트들은 그런 자부심이 있었어요. 박정희 시대 정부 자체가 종합 상사 같았거든요. 박정희는 종합 상사의 CEO 같았고요. 매주 수출진흥확대회의를 가졌고, 월간 경제동향보고회의를 가졌죠. 박정희 대통령은 수출진흥확대회의에는 딱 한 번 빠졌고 월간 경제동향보고회의에는 한 번도 빠지지 않았어요. 회의는 경제를 배우는 교실이었어요. 실무 공무원들을 다 참석시켜 배우고 토의했죠. 당시 경제 관료였던 한 인사는 ‘박정희 대통령은 13년이나 진행된 경제 교실 통해서 경제를 누구보다 잘 아는 지도자가 됐다’고 평가했어요. 

국가를 뜻하는 ‘스테이트(state)’와 통계를 뜻하는 ‘스테틱스(statics)’는 같은 어원을 쓰거든요. 그만큼 통계는 중요해요. 박정희 대통령은 통계청을 포함해 국책 연구원의 위상을 강화했어요.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국책 연구원의 영혼, 스피릿이 사라진 것 같아요. 정치권의 백업 역할만 하고 있죠.”

5. 공간 계획 

“박정희 대통령은 군인 출신이기 때문에 지정학적 사고에 능했어요. 젊어서 만주국에서 국토 개발, 도시 개발 어떻게 하는지 봐왔거든요. 그래서 대통령이 되고 나서 건설부를 만들었어요. 국토종합개발 계획을 실시했고 초기에는 불균형 성장, ‘성장거점이론’이라고 해서 동남권 개발부터 시작했지요. 박정희 대통령이 돌아가시는 날 충남 삽교천에 가셨던 이유가 균형 개발을 시작하고자 하셨던 거라고 하잖아요.

또한 인프라 혁명을 일으켜서 한국에서 교통 물류 혁명을 전개했어요. 대한민국 정부가 해방 이후 만든 철도는 별로 없어요. 거의 다 일제 시대 깔았던 거예요. 박정희는 도로를 많이 깔았어요. 특별히 고속도로를 건설했죠. 

홍수 걱정, 가뭄 걱정 안 할 수 있도록 그때부터 댐을 많이 지었어요. 한강 관리도 시작했고요. 그로 인해 강남 개발도 가능했던 거예요. 옛날엔 강남에 한강이 넘치고 온통 진흙밭이라 들어가 살기 어려웠거든요. 

조선조에 정도전이 한양을 지었을 때 한양에 10만 명 정도 살았어요. 조선조 망할 때 한양 인구가 겨우 23만뿐이었거든요. 서울에 단독주택만 세우면 수용 가능 인원이 조선조 한양과 별다를 바 없어요. 박정희가 아파트를 지었기에 서울이 대도시로 성장할 수 있었어요.”

6. 주거 혁명

“이승만 시대는 먹는 문제가 주 관심사였고, 박정희 시대에 와서야 주거 문제에도 관심을 갖기 시작해요. 지금은 주거 문제를 복지 차원에서 보지만 박정희는 산업 측면에서 봤어요. 한 도시가 일정 규모 이상의 크기로 성장하지 않으면 그 나라의 국부는 성장할 수 없어요. 마르크스가 혁명을 일으키도록 만든 주범은 ‘주거 문제’였어요. 한국에선 대규모 도시 폭동이 일어났던 적이 없지요. 박정희가 주택 정책을 선제적으로 펼쳤기 때문이에요.”

7. 농촌 혁명

“우리의 경제 정책 중 외국에 수출하는 대표적인 정책이 ‘새마을 운동’이에요. 농촌 사람들이 돈을 벌고 현찰을 만지기 시작한 게 새마을 운동 이후였어요.”

8. 의식 혁명

“‘코리안 타임’이라고 들어보셨나요? 우린 산업화 이후에야 시간을 잘 지키기 시작했어요. 바이어와의 약속 준수 중요하잖아요. 사람이 왜 근면해지고 부지런해지면서 성장하나요? 이익이 되면 동기 부여가 되는 거예요. 저는 아시아적 가치, 유교 자본주의를 믿지 않아요. 한국 사람이 부지런해진 것은 자본주의가 들어왔기 때문이에요. 사람의 심성은 체제의 영향을 받습니다. 과거 박근혜 전 대통령에게 아버지가 남긴 가장 큰 업적이 뭐라고 생각하냐고 물었을 때 ‘근면한 국민성 배양’이라고 답하셨어요.”

9. 과학·기술 혁명

“과학기술처를 만들었고 엔지니어를 양성했어요. 대학, 연구소뿐 아니라 공고, 직업훈련원 등에서 배출된 기술자들 모두가 국가 발전의 주역이었죠.”

10. 녹색 혁명

“박정희 대통령은 환경 문제에 대한 선견지명이 있었어요. 당시 공해방지법을 만들었고 그린 벨트를 조성했습니다. 환경을 망치는 가장 큰 주범은 ‘빈곤’과 ‘전쟁’이에요. 북한의 환경을 보면 얼마나 열악합니까.” 

◇ 민주화 & 국민통합

전상인 교수는 박정희 근대화 혁명의 플러스 알파, 토크빌 효과가 ‘민주화’와 ‘사회통합·국민통합’이라며 설명을 이어갔다. 전 교수의 강의 내용이다.

“박정희는 민주화에도 기여한 지도자였어요. 박정희가 길러낸 중산층이 1980년대 한국의 민주주의를 지켜낸 보루가 됐지요. 또한 박정희는 사회통합과 국민통합을 이룬 지도자였습니다. 당시 소득 양극화보다 더 절박했던 사회 갈등의 요소가 신분제의 유산이었어요. 1960년대까지만 해도 반상 의식이 남아 있었어요. 근대화 과정에서 반상 의식이 점차 사라졌고 여성의 지위가 상승합니다. 지역 갈등의 문제도 해결했어요. 우리 국민이 섞이는 기회가 역사상 2번 있었는데요. 6.25전쟁 때 부산에서 한 번, 박정희 시대에 이촌향도에 따라 서울에서 한 번입니다. 그전에는 지역 간 정말 남남처럼 지냈어요.”

전상인 교수는 강의를 마무리하며 ‘대통령이 될 것인가?’, ‘대통령이 되어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두 가지 질문을 제시했다. 그는 민주화 이후 대부분의 대통령은 대통령이 될 생각만 하고 될 준비만 했지, 돼서 무엇을 할지 생각하지 않고 준비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전 교수는 박정희는 대통령이 되는 과정에선 결점이 있었지만, 된 이후에는 그 어떤 대통령보다 우수한 업적을 남긴 지도자였다고 했다. 그는 박정희를 비전과 디테일이 결합돼 있었고, 원칙과 실용이 함께 했으며, 정책의 연속성을 유지했던 지도자로 평가했다.

“코리안 모더나이제이션(근대화) 넘어 코리안 시빌라이제이션(문명) 향해야"

끝으로 전 교수는 박정희에 대한 세간의 의문들에 대해 답을 내렸다. ‘박정희는 영웅인가’라는 물음에 대해서 “그는 범인(凡人)이었다”며 “고민도 많이 하고 실패도 많이 했던 지도자였다”고 평했다. 

이어 ‘박정희는 독재자인가’라는 질문에는 “박정희를 독재자라고 비판할 만한 자격 갖춘 역대 대통령이 과연 있을까”라고 되물으며 “독재가 문제지, 장기 집권은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그는 “박정희의 경우에 헌법 제도와 개인 능력에 미스 매치가 있었다고 생각한다”며 미국에서 루스벨트가 4선을 했고, 대처가 영국의 총리로 11년, 메르켈이 독일 총리로 16년 간 집권했던 사례를 제시했다. 

‘박정희는 친일파인가’라는 질문에 “박정희가 친일만 한 것은 아니다”라며 “그는 일본적 정신을 배운 사람이 아니라 일본적 방법을 배운 사람, 용일(用日)한 사람, 극일(克日)한 사람”이라고 평했다. 또 산업화 세력과 민주화 세력을 양분화하는 것에 대해선 “저는 두 세력이 이미 화해했다고 본다”며 신군부 세력과 YS의 합당, DJP 연합을 그 사례로 들었다.

끝으로 전 교수는 “정치권과 당대의 평가보다 국민과 역사의 평가가 중요하다”며 “코리안 모더나이제이션(modernization)을 넘어 코리안 시빌라이제이션(civilization)으로 가야한다. 그것이 우리가 한 번 더 도약할 수 있는 길”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