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 《69년 전에 이미 지불하셨습니다》 표지.

69년 전에 이미 지불하셨습니다 / 라미 현 著 / 마음의숲

tvN '유 퀴즈 온 더 블럭'에 출연하며 참전용사의 기쁨과 슬픔을 재조명한 사진작가 라미 현(현효제)의 첫 사진 에세이가 나왔다. 라미 작가는 참전용사들이 품고 있던 전쟁에 관한 기억을 역사에 위치 시켜 다음 세대에 전달하겠다는 사명의식으로, 그들의 사진과 이야기를 치열하고 꼼꼼하게 기록했다.

라미 작가는 전 세계 6·25전쟁 참전용사들을 찾아다니며 사진을 찍어드리고 액자에 담아 선물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해왔다. 책 제목 《69년 전에 이미 지불하셨습니다》는 라미 작가가 액자값을 묻는 참전용사에게 건넸던 말이다. 

"선생님께서는 69년 전에 이미 다 지불하셨습니다. 저는 다만 그 빚을 조금 갚는 것뿐입니다"

◇ 기억하기 위해 기록하다

세대 간의 갈등 문제는 매 순간 존재하던 담론이지만, 오늘날 그 갈등이 어느 때보다 더 심화되고 있다. 특히 다른 국가보다 사회적 변혁이 빠른 속도로 이뤄졌던 한국에서 '세대'는 더욱 면밀하게 세분된다. '참전용사 세대', '산업화 세대', 'X세대', '밀레니얼 세대', 그리고 'Z세대'까지. 세대를 구분 짓고 특성을 분류하는 사회적 분위기는 갈등과 분열을 초래하기 쉽다. 그 결과 윗세대의 조언과 기록된 역사는 '낡고 지루한 것'이 돼버렸다.

저자는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라는 말을 받들고, 윗세대의 조언과 기록이 다음 세대에 도움이 될 것이라 믿는다. 저자의 기록은 교과서에서 봤던 지루하고 딱딱한 전쟁사와는 다르다. 영웅의 후일담 혹은 꼰대의 '나 때는'으로 시작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참전용사의 이야기는 한 사람의 드라마다. 그리고 드라마의 갈등이 결국 해소되듯, 치열하고 생생한 참전용사의 기억에서 우리는 세대 갈등을 봉합할 열쇠를 발견할 수 있다.

◇ 전쟁의 포화 속 피어난 '휴머니즘' 조명

전쟁터는 사람이 다치고 죽으며 무수한 세계가 파괴되는 공간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전우애, 생존 의지 등 새로운 가치가 솟아나는 공간이기도 하다. 이 책은 절망적인 사건과 끔찍한 장면을 나열하는 기존 전쟁사의 문법을 따르기만 하지 않는다. 참전용사들이 전쟁에서 경험했던, 때로는 웃음이 새어 나올 정도의 사건이 곳곳에 수록되어 있다.

40년 만에 첫사랑을 다시 만난 사람, 20년 전 친구를 찾기 위해 남의 나라 신문에 광고를 낸 사람, 롤스로이스보다 기아 차가 더 좋다는 사람, 그들은 모두 참전용사였다. 저자는 참전용사를 '전투의 공간'에 덩그러니 세워놓지 않는다. 세심하고 꼼꼼한 인터뷰로 그들의 삶을 '한 명의 인간'으로서 더 폭넓게 조명한다. 

◇ 기록은 새로운 역사를 발굴하는 일

저자는 참전용사들이 옆집 할아버지처럼 친근하게 느껴지다가도, 막상 그들의 사진을 찍으면 눈빛에서 전장의 싸늘함을 읽어낸다고 고백한다. 당연하게도 전장에서 겪은 슬픔이 기쁨을 압도하기 때문일 것이다. 죽음을 코앞에서 목격한 그들은 죽음을 경험한 것이나 다름없다. 그리고 이 '간접 체험'의 힘은 강력하다. 겪어본 적 없는 거대한 슬픔을 간접적으로 체험함으로써 우리는 삶의 가치를 되새긴다.

참전용사들의 이야기를 누구보다 가까이에서 마주한 저자는, 그들이 전투에서 살아 돌아온 생환자이지만 역사의 승리자가 아님을 몸소 느낀다. 그러나 역사는 승자들만의 것이 아니다. 기록이 남는 한 누구나 역사가 된다. 잊히지 않고 무사히 역사가 된 기록은 다음 세대에 어떻게든 메시지를 던진다. 반전(反戰), 자유, 평화 등 잊지 말아야 할 인류의 가치를 길어 올릴 수 있다.

저자는 오늘도 새로운 역사를 발굴한다. 이 사소하다면 사소한 기록이 인류의 유산이 되리라는 사실은 의심할 필요도 없겠다.

작가 라미 현은 미국 아카데미 오브 아트 유니버시티(Academy of Art University)에서 사진을 전공했고 인물 사진을 주로 작업했다. 2016년 '대한민국 육군 군복' 사진전을 개최하며 우연히 만난 참전용사의 사진을 찍고 '프로젝트 솔져'(Project-Soldier)를 계획하게 됐다. 프로젝트를 시작한 이후 22개국 1500여 명의 참전용사를 기록했다.

라미 작가는 "찍은 사진이 다음 세대에 전해지길 바라며, 세상의 모든 한국전쟁 참전용사를 담는 날까지 작업은 계속될 것"이라며 "기록이 곧 역사가 되고, 다음 세대의 자부심이 된다는 믿음으로 나아간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