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조선일보DB

내일(28일) 사퇴할 것으로 알려진 최재형 감사원장의 대권(大權) 출마(出馬) 가능성이 높아지는 가운데, 정가(政街) 일각에서는 최 원장이 권력 분산 개헌(改憲)을 고리로 출마 명분을 쌓고 세력 규합에 나설 것이라는 얘기가 새어나온다. 대통령에 당선되고 임기 2년이 지난 후에, 의회에서 선출된 총리가 내정(內政)을 맡는 내각제 등 이른바 '분권형 개헌'을 단행하겠다는 것. 우리 헌정사에서 내각제(의원내각제)가 실시된 경우는 제2공화국 윤보선 정부의 장면 내각이 유일하다. 1997년 15대 대선 당시 DJP(김대중-김종필) 연합으로 출범한 김대중 정부에서도 내각제 개헌이 유력하게 거론됐지만 끝내 좌초됐다.

현재 의원들은 대체로 여야(與野) 할 것 없이 현 대통령제가 지니고 있는 '제왕적 권력의 폐단'을 지적하면서 분권형 개헌에 찬성하고 있는 입장이다. 특히 대권에 도전하기 어려운 여건을 가진 잠룡들이 내각제 체제 하에서 실권을 쥔 총리, 즉 서양식의 수상(首相) 자리를 노리고 있다는 점에서 '개헌론'은 차기 대선 정국을 집어삼키는 회오리가 될 수 있다. '출마 손익 계산기'를 두드리는 유력 잠룡들과 정치 야심가들이 개헌론을 띄우는 대선주자에 모여들어 자신의 정치 미래와 세력을 의탁할 수 있는 것이다. 더욱이 개인적 역량과 인품만 뛰어난 것으로 알려지고, 아직까지 기반이 튼튼한 정치세력은 모으지 못한 최 원장으로선 정치권에서 구미가 당길 만한 개헌론을 '세 불리기'의 수단으로 활용할 가능성이 있다.

대표적인 개헌론자인 김종인 전 국민의힘 비대위원장은 22일 《동아일보》에 최 원장이 "대통령 5년 임기 중 2년만 하고 2024년 총선에서 내각제를 도입하는 개헌을 검토할 가능성이 있다"고 전했다. 김 전 위원장은 "정권 교체가 된다 해도 (더불어민주당이 다수인) 국회 구성 때문에 차기 대통령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고 개헌 필요성을 강변했다. 그는 "그 사람(최 원장)은 권력에 대한 집착이 없고 부친으로부터 '국가에 충성하라'는 얘기를 많이 들었다고 한다. 자신의 임기를 포기하는 개헌을 검토 중이라는 얘기를 간접적으로 들었는데, 윤석열 전 검찰총장에겐 그런 생각이 있는지 기대하기 어렵다"고 부연했다.

이기홍 《동아일보》 대기자는 25일 칼럼에서 "최근 김종인 등이 최재형 감사원장을 거론하며 차기 대통령 2년 임기 후 내각제 개헌을 얘기하는데, 이런 풍선 띄우기를 가볍게 봐선 안 된다"며 "집권세력 내 '정치 9단'들도 대선 판세가 불리해지자 비슷한 시나리오를 설계한 바 있다. 의원들은 여야를 떠나 내각제 선호가 많고, 친문(親文)은 문재인 대통령 퇴임 후 심판(보복)받을 우려가 훨씬 적다는 점에서 환영할 것"이라고 분석했다.

한 국민의힘 관계자는 22일 '뉴스1'과의 통화에서 "당내 의원 중에서도 개헌에 찬성하는 의원이 많기 때문에 이런 메시지(개헌론)를 전면에 내걸고 최 원장이 등판한다면 당내뿐만 아니라 김종인 전 비대위원장의 도움도 받을 수 있을 것으로 본다. 또 그런 움직임이 실제 있는 것으로 안다"고 전하기도 했다.

분권형 개헌론자이자 최 원장 지지그룹의 좌장으로 알려진 정의화 전 국회의장은 23일 《조선일보》와의 통화에서 "차기 대통령은 대통령에 집중된 권력을 분산하는 원포인트 개헌을 해야 한다. 이번 대통령 5년 임기를 2년으로 줄여 2024년 총선과 대선을 같이 치러 이원정부제를 도입해야 한다"며 "최 원장도 현행 대통령제의 문제점이 심각하다는 것을 알 것이기 때문에 이 같은 개헌에 동의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야권의 한 인사도 《조선일보》에 "야권 후보가 내년 대선에서 승리한다 해도 국회 의석수 열세 때문에 국정 수행에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고, 국회 다수파인 현 여권 주류에서도 개헌 추진 움직임이 있는 만큼 분권형 개헌은 최 원장이나 개헌론자 모두에게 윈윈하는 방안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반면 최 원장의 개헌론 제시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분석도 나온다. 개헌론 자체에 대한 부정적 평가도 있다. 26일 '데일리안' 보도에 따르면, 최 원장 측의 한 관계자는 "최재형 원장은 우리나라가 아직 의원내각제를 실시할 만큼 정치적 환경이 성숙하지 못했다고 보고 있다"며 "본인은 개헌에 전혀 뜻이 없는데 잘못 알려졌다"고 말했다. 25일 《시사저널》 보도에 따르면, 최 원장과 수시로 대화를 나누는 한 지인은 "최 원장한테 개헌 얘기를 한 번도 듣지 못했다. 출마와 개헌은 관계가 없다"고 일축했다. 같은 날 김재원 국민의힘 최고위원은 KBS 라디오 '최경영의 최강시사' 인터뷰에서 "김종인 전 비상대책위원장이 주장하는 대로 임기를 2년 만에 사퇴하고 내각제 개헌을 하겠다고 공약을 하고 출마한다면 국민들이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며 "그런 조건을 내걸고 출마한다면 별로 바람직하지 않고 말리고 싶다"고 우려했다.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는 24일 페이스북에 쓴 글에서 "개헌을 고리로 이상한 정치 야합이 꿈틀거리고 있다. 이슈 전환을 통해 실정을 덮으려는 현 정권 주류와 개헌으로 사익을 추구하는 야권 일부가 손잡고 권력을 나누자는 것"이라며 "국민이 납득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현 정권의 잘못을 그냥 덮으면 미래로 나아갈 출발점이 사라진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