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2년 대선 특별기획-기적의 나라 대한민국, 7인의 대통령'(정치 카페 하우스, 하태경 국민의힘 의원, 조정훈 시대전환 의원 공동 주최) 제3차 강연이 지난 22일 오후 7시 서울 여의도 정치 카페 '하우스(HOW'S)'에서 열렸다.
위즈덤센터와 한국복지통일연구소 수석연구위원을 역임한 황태순 평론가가 '전두환, 산업화에서 민주화로 가는 격랑의 다리'라는 주제로 강연했다. 토론은 주동식 국민의힘 광주광역시 서구갑 당협위원장, 사회는 허숭 협동조합 하우스 이사가 맡았다.
황태순 평론가는 '경제성장'과 '물가안정'을 동시에 이뤄낸 전두환 정부의 경제 정책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그는 "혹자는 당시 3저(三低) 호황(저달러·저유가·저금리)으로 전 대통령이 아니었어도 누구나 경제성장과 물가안정을 이룰 수 있었다고 주장하는데, 당시 두 가지를 동시에 이뤄낸 국가는 전 세계적으로 우리나라가 유일했다"고 말했다.
그는 전두환 정부의 경제 업적에는 물가안정과 개방정책을 펼쳤던 김재익 경제수석의 역할이 컸음을 강조하며, "전 대통령은 참모의 조언에 귀 기울일 줄 아는 지도자였다"고 했다.
황 평론가는 "전두환 정부 시절은 우리의 선입견과는 달리 '자율'과 '개방'을 추구했던 면이 많다"며 '통행금지 폐지', '교복 자율화', '두발 자율화', '여행 자율화' 등의 정책을 소개했다. 그는 "전두환 정부에서 두텁게 형성된 중산층이 반(反)자유 정책에 저항하는 세력으로 부상했고 이들로 인해 민주화가 가능했다"며 "전 대통령은 6·29선언을 통해 국민들의 민주화 열망을 수용하며 지혜롭게 퇴진했고, 우리 역사상 최초로 평화적 정권이양을 이뤄낸 지도자였다"고 했다.
전두환 정부의 과실로 '무자비한 노동탄압', '정경유착과 천문학적 비자금', '질식상태의 학원가'를 꼽았다. 황 평론가는 "전두환 대통령은 짧은 영화(榮華)를 누렸지만, 과거 백담사 행(行)과 사형 선고에 이어 최근 광주에서의 재판까지 기나긴 심판을 받는 중"이라고 말했다.
그는 "전두환 대통령의 많은 과실이 있지만, 공적에 대해서도 객관적으로 평가하고 인정할 부분은 인정해야 한다"며 "시대의 요구를 100% 충족시키진 못 했지만, 산업화에서 민주화로 가는 격랑(激浪)의 다리 역할을 해낸 지도자였다"고 평가했다.
이하는 황 평론가의 강연 중 주요 내용을 요약·정리한 것이다.
황 평론가는 전두환 대통령의 공과(功過)를 다음 10가지 테마로 정리해 전달했다.
▲경제성장과 물가안정 ▲자율과 개방 ▲IT산업의 초석 닦기 ▲北과의 대결과 대화 ▲6·10항쟁과 6·29선언 ▲평화적 정권이양 ▲무자비한 노동탄압 ▲정경유착과 천문학적 비자금 ▲질식상태의 학원가 ▲짧은 영화와 기나긴 심판
◇ 경제성장과 물가안정
우리나라는 전두환 정부 이전까진 만성 인플레이션에 시달렸다. 경제성장과 물가안정의 두 마리 토끼를 한 번에 잡는 것은 '뜨거운 아이스아메리카노'와 같은 어려운 일이었다. 전두환 정부의 경제 정책에 있어 1983년 미얀마 아웅산 묘역 폭탄 테러 사건으로 세상을 떠난 김재익 경제수석의 역할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박정희 시대 때 경제 정책을 이끌었던 남덕우 부총리는 '성장론자'였고, 김재익은 '안정론자'로 방향성이 달랐다. 남덕우 경제팀에선 아웃사이더였던 김재익을 전 대통령이 발탁해서 경제 수석으로 기용했다. 성장론자와 허화평·허삼수·이학봉 같은 군 출신의 엄청난 견제에도 불구하고 전 대통령은 김 수석을 믿고 경제정책을 맡겼다. 전 대통령은 표(票)를 생각하면 절대 해서는 안 될 두 가지를 했다. '임금 억제'와 '이중곡가제 폐지'다. 이중곡가제는 생산자로부터 쌀을 고가로 사들이고 소비자에게는 싸게 팔아서 그 차액만큼 정부가 부담하는 방법이다. 또한 '제로 베이스 버짓'(Zero Base Budget), 긴축 정책을 펼치며 정부가 솔선수범을 보였다. 그렇게 해서 물가를 안정시키고, 인플레이션 문제를 잡아냈다. 세계적으로 3저 호황도 누리면서 경제를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혹자는 3저 호황 덕분에 전두환이 아니어도 누구나 다 할 수 있었다고 주장한다. 죄송한 말씀이지만 당시 다른 나라는 못 했고 우리나라만 해냈다. 전 세계적으로 3저 현상을 이용해서 경제성장과 물가안정을 이룬 국가는 대한민국밖에 없다. 당시 아시아 4마리 용 국가들도 못 했던 거다.
◇ 자율과 개방
전두환이 자율? 개방? 30년 동안 있었던 밤 12시 통행금지를 푼 것이 전두환 대통령이다. 이 무렵에 '교복 자율화', '두발 자율화', '여행 자율화'가 됐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에는 유학을 가고 싶어도 갈 수 없었다. 국가에서 하는 시험을 통과해야 했다. 박정희 시대는 틀어 잠그고 경제 발전만 하는 폐쇄 정책을 펼쳤다. 그렇게 하면 안 된다고 판단한 게 김재익 수석이다. 외국을 향해 일정 부분 문을 여는 지금의 자연스러운 경제 형태를 생각했다. 전두환 대통령이 참모 말을 잘 들었다. 경제 참모에 김재익 수석이 있었다면 정치 참모에는 군 출신의 허화평, 조선일보 출신의 허문도 그리고 허삼수 등이 있었다. 5공화국에서 '연좌제 폐지'를 이끈 것이 허화평씨다. 조선 말기 광무개혁 때 연좌제가 폐지된 것으로 돼 있으나 1980년까지 연좌제는 존재했다.
이건 세상에 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인데 최근 박태준 총재의 최측근한테 들은 얘기다. 포항제철에 이어 제2제철소 건설을 추진했던 때가 박정희 말기였다. 당시에는 장소가 '아산만'으로 결정됐었다. 박정희 대통령 서거 이후 아산만은 지반이 약해서 용광로를 놓을 수 있는 곳이 아니라고 포철 쪽에서 문제를 제기했다. 당시 결정권은 건설부에서 갖고 있었는데, 박태준의 포철 쪽에선 광양만을 지지했다.
이 문제를 놓고 전두환 대통령은 '건설부도 고민이 많겠고, 포철도 고민이 많겠다. 내가 몇 날 며칠 고민해봐도 결론 내리기 쉽지 않다. 그러나 앞으로 운영할 곳은 포철이기 때문에 광양만으로 한다. 내가 안기부나 보안사 등 기관을 통해서 뒷조사를 해봤더니 아산만에는 건설부 공무원들이 땅을 많이 사놨구만. 포철 임원들은 광양에 땅 사놓은 것이 없더구만'하면서 포철의 손을 들어줬다.
전두환 대통령을 폄훼할 때 많이 하는 얘기가 3S 정책이다. 스포츠(Sports), 섹스(Sex), 스크린(Screen). 1982년에 프로야구가 시작됐고, 1981년부터 컬러 텔레비전이 도입됐다. 우리가 박정희 대통령 때 흑백 텔레비전을 보고 있을 때 북한에선 이미 칼라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지나친 '엄숙주의'를 추구했다. 아직 우리 수준에선 컬러 텔레비전이나 프로야구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반면 전두환의 참모들은 '우리가 이럴 때가 아니다. 일본과 가까운 부산에선 이미 컬러 텔레비전을 본다'며 컬러 텔레비전 도입을 주장했다.
당시 전두환 5공 정부의 참모들, 그중에서도 핵심적 그림을 그렸던 게 허화평씨다. 허화평은 5공 정부의 설계자로 캐치프레이즈였던 '선진정부 창조'를 이끌었다. 5공 정부는 중산층을 두텁게 하는 정책을 펼쳤다. 예상하지 못했던 것 같은데,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된 국민들이 자유를 갈망하며 정부의 반자유 정책에 저항했고 민주화가 가능할 수 있었다.
◇ IT산업의 초석 닦기
IT산업 하면 김대중 대통령을 떠올리지만, 초석을 닦은 것은 전두환 대통령이다. 옛날엔 전화기 한 대가 집 한 채 값이었다. 동네 전체에 전화기가 한 대뿐이었고 공중전화 앞에 줄 서서 연락했다. 전 대통령은 육사 시절 성적이 좋지 않았다. 꼴찌에서 2번째로 입학했고, 156명 중 126등으로 졸업했다. 육사 4년 내내 우수한 성적을 거뒀던 김성진 장군을 체신부 장관에, 오명씨를 차관으로 앉혔다. 전두환 대통령 때 세계에서 10번째로 국산 '전전자교환기'(Digital Electronic Switching System)를 개발했다. 또 행정전산망을 만들었는데 이게 오늘날 인터넷의 초기 형태이자 전자정부의 출발점이라고 보면 된다. 당시 빌 게이츠가 한국의 행정전산망에 대한 소식을 듣고 한국을 방문했는데, 당시에는 지금처럼 이름이 알려지기 전이었고 사업상의 진전을 이루지 못 한 채 돌아가게 됐다는 이야기도 있다.
1980년에 앨빈 토플러의 《제3의 물결》이 나오고, 앞으로 '정보화 시대'가 올 것이라는 얘기가 나오면서 전두환 대통령은 IT분야 육성에 대한 참모들의 조언을 받았고, 이병철·정주영 회장 등 기업인들한테 'D램'이란 것이 있는데 개발해보자고 했다. 1984년 삼성의 256K D램 개발을 시작으로 1988년 4M D램을 개발했고 오늘날까지 이어지게 됐다.
◇ 北과의 대결과 대화
차기 정권인 노태우 정부에서 꽃피운 게 '북방정책'이었다. 남북한이 동시에 유엔에 가입했고, 북방에 있는 여러 국가들과 수교를 맺었다. 그 준비는 1983년 전두환 대통령과 노신영 안기부장이 북방정책팀을 운영하면서 시작됐다. 5공 말기 안기부장 특보로 있던 박철언 전 의원이 이후에도 북방정책팀을 이끌면서 노태우 정부 시절에 꽃 피운 것이다.
1985년 추석에 고향방문단, 예술공연단을 남북이 서로 교환했다. 1953년 휴전선이 그어진 이후에 32년 만에 그런 초석을 다진 것도 5공 정부의 공로로서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 6·29선언과 평화적 정권이양
전두환 대통령은 1986년에 유럽을 순방하면서, 유럽 국가들이 '내각제'를 하는 것을 보고 내각제 개헌을 생각하게 된다. 그런데 내각제 개헌이 어려워 보이니깐 주장했던 것이 '호헌'(護憲), '간선제 유지'였다. 이것은 YS, DJ 등 야권뿐 아니라 국민들의 엄청난 저항을 받았다. 이후 6·29선언은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군부 세력이 굉장히 지혜롭게 후퇴한 것이다. 그렇지 않았으면 피를 봤을 것이고 88올림픽도 열릴 수 없었을 것이다. 중국에선 천안문 사태가 일어났고 중국은 세계로부터 왕따를 당했다. 이후 유일하게 손 내미는 국가가 우리나라였기 때문에 한중수교도 가능했던 것이다.
한계와 문제점은 분명 있지만, 전두환 시대는 6·10항쟁과 6·29선언을 거치며 '산업화'와 '민주화'를 잇는 격랑 속의 다리 역할을 했다. 우리는 그 다리를 건너온 것이다. 전두환 정부는 평화적 정권 이양을 했던 최초의 정부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