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근 여권의 한 대선주자는 ‘해방 후 대한민국의 출발이 깨끗하지 못하다’고 발언해 논란을 샀다. 당시 잔존(殘存)했던 ‘친일(親日)세력과 미(美) 점령군’들이 합작(合作)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제때 일제의 잔재를 청산하지 못하고 외세와 결탁했다는 시각은 당시 독립운동의 주체였으며 대한민국 건국의 주역인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부정적 평가로 이어지기 마련이다. 실제 해당 후보는 과거 “이승만 전 대통령은 친일 매국 세력의 아버지”라고 말하기도 했다. 일각의 시각처럼 진정 이승만 대통령은 양이(洋夷)에 부역(附逆)한 노회한 독재자에 불과한가? 전문서적을 통해 이승만 대통령의 정치적 진면목(眞面目)과 우리나라 해방·건국사(史)에 남겨진 공적(功績)을 살펴봤다.
일본의 침략을 예지하고 독립운동에 나서다
이택선 충남대 사회과학연구소 교수 연구원의 학술서 《우남 이승만 평전》에 따르면, 이승만 대통령은 일제강점기 당시 일본의 미국 침략 등 제국주의적 팽창 야욕을 정확히 꿰뚫어보고 있었다. 나아가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대한 국제적 승인을 촉구하고 광복군 등 독립운동 진영의 활동을 세계에 알리는 일을 해왔다. 책은 “이승만은 1933년 1월경부터 일본의 팽창을 경고하고 있었다. 1933년 1월 13일 일기를 보면, 이승만은 강대국들이 일본에 대해 단지 한국을 먹잇감으로 삼은 데 만족하고 만주에서 개방 정책을 펼칠 것이라고 믿고 있지만, 조만간 한국은 일본의 침략 야욕의 첫 번째 단계일 뿐이고 만주가 다음 단계이며 이마저도 결코 끝이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게 될 것이라고 제네바 주재 미국 영사에게 말한 바 있었다”고 적고 있다.
〈그러다가 1941년 12월 일본이 실제로 진주만을 공격하자 (이승만이 쓴) 《일본 내막기》는 3쇄를 기록할 정도로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이승만은 높아진 지명도에 힘입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대표로서 미 국무부에 임시정부와 한국의 독립을 승인해 줄 것을 끊임없이 요청하였다. 당시 이승만은 미국으로부터 대한민국 임시정부 승인과 광복군에 대한 군사적 지원을 획득하기 위해 그 어느 때보다 동분서주했다. (...) 이승만은 1942년 6월 13일부터 7월에 걸쳐 개국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미국의 소리’ 방송을 통해 국내외 동포에게 우리말과 영어로 광복군의 활동을 알리는 육성 방송을 했다.〉
미국을 압박해 굳건한 한미동맹을 이루다
이신우 《문화일보》 논설고문의 저서 《좌파 몰락의 내재적 접근》에 따르면, 이승만 대통령은 해방·전쟁기에 미국에 영합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특유의 협상력으로 미국을 압박해 현재까지 우리나라를 굳건히 지켜주고 있는 ‘한미동맹’을 이뤄냈다. 책은 “진보 좌파들은 모든 한국 현대사 서적에서 마치 미국이 이승만을 앞세워 한국을 재식민지화 해버린 것처럼 묘사하지만 이승만은 결코 미국의 꼭두각시가 아니었다. 혹시 미국이 이승만을 그렇게 만들고 싶어했는지는 모르겠으되, 이승만은 그렇게 호락호락한 인물이 아니었다”며 “미국은 한때 자기네들이 원치 않는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요구하며 고집을 부리는 이승만을 제거하기 위한 비밀 계획까지 마련했었다. 비록 실행에 옮겨지지는 않았지만 미국이 그를 얼마나 귀찮고 힘든 존재로 인식하고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라고 적고 있다.
〈새로 미국 대통령에 취임한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이승만의 상호방위조약 요구를 거부하는 대신 군사·경제 원조를 제공할 의사가 있다고 통보했다. 이승만은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미국의 한국 안보에 대한 확고한 공약이 없는 한 아무 쓸모없는 제안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그런 가운데 이승만은 휴전회담에서 합의된 전쟁포로 교환에 대한 결정을 거부하고 마침내 2만7000명의 반공포로를 석방해버렸다. 반공포로 석방은 미국과의 줄다리기에서 이승만에게 남아 있던 마지막 카드였다. 하지만 이 사건은 세계에서 가장 허약한 나라의 늙은 지도자가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나라인 미국에 대항해서 외로운 투쟁을 하고 있음을 생생히 보여주었다.
(...) 곧이어 소련 지도부가 휴전협상을 마무리 지으라는 지시를 내렸고 협상은 계속 진행됐다. 휴전을 선거 공약으로 내걸었던 미국의 아이젠하워도 하루 속히 휴전협정 체결을 원했다. 공약에 묶여 있던 아이젠하워도 한국을 설득하기 위해 이승만의 동맹 제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한미 양국이 상호방위조약에 조인한 것은 1953년 10월 1일이었다. 한국군 20개 사단으로의 증강과 10억 달러 군사원조는 이승만의 추가 요구대로 받아들여졌다. 마침내 이승만은 승리했다.〉
분단의 책임은 이승만이 아닌 스탈린에 있다
이영훈 서울대 명예교수의 책 《대한민국 이야기》에 따르면, 흔히 이승만 대통령의 남한 단독 정부 수립 선언으로 인해 남북 분단이 초래됐다고 보는 시각은 잘못됐다. 책은 소위 이 대통령의 ‘정읍 발언’을 걸고넘어지는 일각의 주장에 대해 “이것만큼 심한 중상모략도 없는 것 같다”고 지적한다.
〈흔히들 분단의 책임을 1946년 6월 3일, 후일 초대 대통령이 된 이승만이 전북 정읍에서 한 발언에 있다고 합니다만, 이것만큼 심한 중상모략도 없는 것 같습니다. 소련이 해체되고 난 뒤 비밀이 해제된 모스크바의 문서에 의하면 스탈린은 벌써 1945년 9월 20일에 북한의 소련군정에, 소련의 이해관계에 적합한 독자의 정부를 북한에 세우도록 비밀지령을 내렸습니다. 동 문서는 일본의 마이니찌(每日)신문의 기자가 발견하여 1993년 3월 26일자로 공개하였습니다. 스탈린의 비밀지령은 7개 항인데, 제2항이 해당 부분입니다. 그대로 인용하면 “북한에 반일적 민주주의 정당·조직의 광범위한 블록(연합)을 기초로 하는 부르주아 민주주의 정권을 확립할 것”입니다. 말이 좀 어렵습니다만, 간단히 말해 사회주의 혁명을 단번에 실행하기는 힘드니까 공산당의 주도로 제1단계의 민주주의 혁명을 추진하라는 뜻입니다. 이렇게 스탈린의 북한 정책은 처음부터 확고하였습니다. 그는 사회주의 제국에서는 누구도 그의 권위에 도전할 수 없는 황제와 같은 존재였습니다. 황제의 지엄한 명령으로 한반도 북쪽의 정치적 운명은 1945년 9월 그때부터 이미 결판이 나 있었던 것입니다.〉
민주혁명 이끈 이승만, 시대적 소명 다한 지도자
김영호 성신여대 교수의 공저(共著) 《한국 자유민주주의와 그 적들》에 따르면, 이승만 대통령은 자신에게 주어진 ‘시대적 소명을 다한 지도자’였다. 활발한 독립운동을 통한 해방, 자유민주주의를 기초로 한 건국을 완수하고 조국(祖國) 대한민국을 반석 위에 올려놓고 떠난 우리의 첫 대통령이다. 책은 “해방 직후 국내의 무정부적 상황과 국제정치적 압력에 능동적으로 대처하면서 1948년 민주혁명을 이끈 지도자는 이승만이다”라며 “흔히 이승만의 업적을 평가할 때 여기까지는 잘했고 저기까지는 문제가 있었다는 식으로 보는 공과론(功過論)이 있다. 이것은 정치를 일종의 응용도덕적 관점에서 바라보는 잘못된 인식으로, 도덕에서 정치가 나오는 것이 아니고 정치가 도덕을 규정하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건국 과정에서 이승만의 리더십 하에서 자유민주주의 체제에 입각한 대한민국이 세워지지 않았다고 한다면 한국인이 자유와 인권을 누리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이런 사실은 기아와 인권 탄압에 시달리는 ‘실패국가 북한’과 ‘성공국가 대한민국’을 비교해보면 정치를 도덕적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이 얼마나 낭만적인 생각인지를 쉽게 알 수 있다.
국가 지도자에 대한 평가는 도덕 교과서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모든 지도자에게는 자신에게 주어진 시대적 소명이 있다. 이런 시대적 소명을 완수했는지가 지도자 평가의 기준이 되어야 한다. 이승만 박사에게 부여된 시대적 소명은 자유와 평등과 인권이 실현되는 나라를 세우라는 것이었다. 그는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을 세우고 북한의 남침으로부터 이를 지켜내고 한미동맹 체결을 통해서 국가안보를 반석에 올려놓음으로써 시대적 소명을 다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가난에서 국민을 벗어나게 하고 산업화를 통해서 국가 기반을 구축해야 한다는 역사적 임무를 부여받았다. 그는 국내의 반대를 무릅쓰고 한일 국교 정상화를 통해서 자본과 시장을 확보하고 이승만의 민주혁명에 뒤이어 산업혁명을 완수했다. 시대적 소명을 다하고 국가 발전의 기틀을 다진 이승만과 박정희 대통령을 역사교과서가 온갖 왜곡을 통해서 깎아내린다는 것은 한국 정치체제에 대한 단순한 비판을 넘어서서 도덕론을 가장한 체제 전복적 사고와 연결되어 있다고 볼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