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무소속으로 ‘제3지대’에 머물고 있는 야권 잠룡(潛龍) 윤석열 전 검찰총장과 중도정당(中道政黨)을 지향하는 국민의당의 안철수 대표가 합작(合作)해 중도보수 ‘빅 텐트’를 구축할 가능성이 커졌다. 윤 전 총장의 국민의힘 조기 입당(入黨), 국민의힘과 국민의당의 합당(合黨)이 불투명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야권 경쟁 주자인 최재형 전 감사원장이 조기 입당을 선택, 국민의힘 진영에서 활동하는 반면 윤 전 총장은 입당 대신 ‘독자 대권 행보’를 이어나가면서 ‘마이 웨이’를 고수하고 있다. 일각에서는 그가 입당을 통한 대권 후보 경선 참여 대신, 국민의힘에서 선출된 후보와 ‘막판 단일화’를 하는 시나리오를 그리고 있다고 분석하기도 한다. 제3지대를 개척한 선배 정치가인 안철수 대표 또한 국민의힘과의 합당을 위한 지지부진한 샅바 싸움을 미루고 윤 전 총장 진영과 손을 잡아 세력을 키울 수 있다. 윤 전 총장과 안 대표의 공동진영이 제3지대 빅 텐트를 구축해 정계의 한 축을 이루게 되면, 최 전 원장을 흡수한 제1야당 국민의힘과도 ‘차기 야권 재편 주도권’을 두고 치열하게 경쟁할 수 있다.
당초 양당(兩黨)은 이달 내 합당 절차가 마무리될 것으로 봤지만 당 실무 운영에 있어 서로 입장 차가 커 후속 절차에도 난항이 예상된다. 당명(黨名) 변경과 당직(黨職) 인선 등이 쟁점으로 아직 풀리지 않고 있는 문제다. 양당 간 신경전이 이어지면서 앙금도 남았다. 안 대표는 지난 21일 대구를 방문한 자리에서 “모든 안을 만들어줬는데도 답이 없다. 국민의힘이 합당 의지가 있는지 모르겠다”고 털어놨다. 이에 다음날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는 최고위원회의 직후 기자들에게 “(안 대표가) 국민의힘이 합당 의지가 없다는 취지의 발언을 하셨는데 상당히 유감”이라고 받아쳤다. 국민의당 실무협상단장인 권은희 원내대표는 23일 ‘KBS 라디오 - 최경영의 최강시사’에 출연, 합당 시기를 놓고 “여름에 대해서는 상당히 저희도 뭐라고 말씀드릴 수 없다. 시기와 관련해 정말 불투명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원활한 합당을 위해 이준석 대표가 안 대표에게 만남을 제안하기도 했지만 실무 조율은 여전히 안갯속이다.
한편 윤 전 총장의 ‘독자 행보’가 계속되자 국민의힘 측에서는 “여의도 정치를 피하지 말고 당에 들어와 제대로 된 조언을 받으라”고 경고하고 있다. 이준석 대표는 ‘윤 전 총장이 안철수 대표의 제3지대 행보와 비슷하다’며 실패의 전철을 밟는 게 아니냐고 우려한다. 최근 들어 윤 전 총장의 지지율이 떨어지는 여론조사 결과가 나오자, 당에서는 ‘안정적 플랫폼에서 대권 행보를 이어나가야 성공한다’며 압박 전술에 나선 것. 향후 야권 단일 후보 선출 과정에서 윤 전 총장 측이 협상력 내지는 경쟁력을 발휘할 수 없도록 견제하는 모양새다. 그러나 윤 전 총장은 “여의도 정치가 따로 있냐”며 조기 입당 가능성에 사실상 선을 긋고 나섰다. 그는 “그런 (현실 정치에 대한) 거부감으로써 어떤 정치적인 선택과 그 행로를 정하는 데 영향을 받거나 하진 않는다”고 했다. 윤 전 총장의 이른바 ‘제3지대 개척 행보’는, 그를 직접 만난 ‘진보 지식인’ 진중권 전 동양대 교수와 ‘여의도 차르’로 불리는 김종인 전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도 예견한 전략이었다.
윤 전 총장과 안 대표는 지난 7일 서울 종로구의 한 중식당에서 110분간 회동했다. 양측 관계자는 회동 후 “두 사람은 오늘 만남을 통해 다섯 가지 사항에 대해 공감을 표했다”며 아래와 같이 설명했다. 첫째, 윤 전 총장은 안 대표의 야권통합 정신과 헌신으로 서울시장 재·보궐선거에서 압승하는 데 크게 기여한 부분에 대해 경의를 표했다.
둘째, 안 대표는 윤 전 총장의 공정과 상식을 바로 세우기 위해 정치적 결단에 대해 경의를 표했다.
셋째, 두 사람은 정치·경제·외교·노동 등 다양한 분야에 대해 서로 의견을 나누고 소득주도성장과 탈원전 정책, 전 국민 재난지원금 등을 비롯한 문재인 정부의 잘못된 정책을 고치고 바로 잡아야 한다는 데 의견을 같이했다.
넷째, 두 사람은 정권교체 필요성에 공감하고 정권교체를 위한 선의의 경쟁자이자 협력자임을 확인했다. 확실한 정권교체를 통해 야권의 지평을 중도로 확장하고 이념과 진영을 넘어 실용정치 시대를 열어가야 한다는 데 의견을 같이했다.
다섯째, 두 사람은 필요한 경우 언제든지 서로 만나기로 했다. 정치적, 정책적 연대와 협력을 위해 필요한 논의를 계속 이어나가기로 했다.
5가지 사항 중 눈에 띄는 것이 바로 ‘야권의 지평 확장’이다. ‘실용정치 시대를 열기 위해 야권의 지평을 중도로 확장’하기로 양측이 공감했다는 것이다. 야권의 경쟁자 관계이기도 한 윤 전 총장과 안 대표가 상호 협력, ‘중도 빅 텐트’를 기반으로 ‘문재인 정권 심판’에 나설 것인지 귀추가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