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북한의 지령을 받고 정부의 미국산 스텔스 전투기 F-35A 도입을 반대한 이른바 '청주 노동운동가 일당'의 구체적인 정치 공작과 용공(容共) 행각이 경찰과 국정원 수사 결과 점차 드러나고 있다. 7일 《조선일보》에 따르면, 이들은 북한의 지령에 따라 국내 정당인 민중당의 의사결정 과정 등 내부 동향을 수집하고, 포섭 대상으로 지목된 민중당 및 시민단체 간부 등에 대한 신상을 탐지해 북한에 보고했다. 국정원 등이 확보한 이들의 보고서와 지령문은 84건으로 포섭 대상 등으로 거론된 한국인만 60명에 달한다. 이중 북한이 직접 포섭을 시도한 인물도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이들은 비밀 접선, 지령 보관, 혈서 작성, 암호 설정, 신분 위장 등 북한에 대한 충성맹세와 보안수칙을 지키며 공작 행위를 이어온 것으로 드러났다.
이들은 국내 정치에 광범위하게 개입하기도 했다. 여권의 중진 의원을 접촉하고, 총선 및 지방선거에 출마했으며, 19대 대선 당시 문재인 후보 선대위 특보로 활동한데다, 지난 1월엔 야권의 대선후보로 점쳐지던 윤석열 당시 검찰총장에 대한 탄핵 광고 모금 운동에 나서기도 했다. 검찰은 이들의 행위가 반국가단체의 지령을 받아 국가기밀 등을 탐지·수집·누설·전달하는 목적수행 혐의에 해당한다고 보고 있다. 국가보안법상 목적수행 혐의는 '간첩죄'로 불리며, 사형·무기 또는 7년 이상의 징역형에 해당하는 중대범죄다.
한반도 적화통일을 위한 북한 정권의 대남 공작은 분단 이래 간첩, 공작원, 무장공비 남파 및 종북 세력 형성 등으로 수십 년간 이어져 왔다. 박정희 정부 때는 귀화 일본인이 간첩으로 밝혀진 경우도 있었다. 외교사료관의 관련 외교 문서 내용을 옮기면 다음과 같다.
귀화 일본인 사와모또(夏谷道, 한국명 전주진) 간첩사건
중앙정보부는 1973.7월 외무부에 ‘귀화 일본인 간첩 검거’ 제목의 아래 내용의 문서를 통보함.
• 인적 사항: 사와모토 산지(57세, 한국명 전주진), 원적 평안북도, 현주소는 일본 고베시, 목재업 종사
• 경력: 1961년 이래 홍콩, 태국, 자카르타 등지에서 판매업 또는 가공업
• 범죄 사항
- 1969.2월 싱가포르 주재 북한 공작원에 의해 포섭
- 1971.4월 평양에서 간첩 교육
- 1971.8.22. 서울에 잠입, 동생 및 조카 포섭 가능성 탐색
- 1972.11.20. 평양에서 반복 교육, 7·4 공동성명 이후 한국 내 진행사항 보고
- 1973.7.7. 오사카에서 검거
"6.25 이후 2018년 말까지 간첩 남파 등 北 대남 공작 2000회 넘어"
유동열 자유민주연구원장은 《월간조선》 2019년 10월호에 실린 글 '文在寅 정권하 對共수사 無力化 실상'에서 "6.25 남침 전쟁 이후 2018년 말까지 북한의 대남 침투 적발과 간첩 검거 통계는 2000회를 넘는다. 2000년대까지는 1956건으로 집계된다"며 "이러한 북한의 대남 간첩 침투 공작을 국정원·기무사(현 군사안보지원사령부)와 경찰 대공수사관들이 막아낸 것"이라고 분석했다.
유 원장은 "김정은 시대의 대남공작 특징은 간첩공작 부서의 활동 영역을 확대하고, 대남침투 루트를 다양화하고, 탈북자(脫北者)들을 활용한 대남공작을 확대하는 등 온·오프라인을 배합하며 공세적으로 간첩공작을 구사한다는 점"이라고 설명했다.
"김정은은 우리 내부의 종북세력과 연계한 '대남공작의 진지'를 더욱 확대하고 있다. 북한은 김정일 시대부터 남파간첩을 통한 전통적인 '지하당(地下黨) 구축 공작'과 병행하여 우리 내부에 북한의 대남혁명 전략을 수행할 '합법적 전위(前衛)정당' 이른바 민중당·민주노동당·통합진보당 같은 '진보정당'의 구축과 침투를 위해 노력해왔다. 김정은은 이를 더욱 강화하고 있는 것이다.
이른바 북한의 남조선해방전선과 관련해, 과거에는 북한이 남파한 빨치산이나 무장공비들이 제2전선(戰線)을 형성했다. 하지만 1990년대 중반 이후에는 종북세력이 그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다. 북한 입장에서 볼 때 국내 종북세력은 이른바 남한혁명역량을 강화시킬 수 있는 가장 적합한 혁명원천(源泉)이며, '저(低)비용·고(高)효율의 비대칭전력(非對稱戰力)'인 것이다."
"北, 국내 대선-총선 등 권력 재편기마다 대남 정치 공작 전개"
위 청주 일당이 여러 국내 선거 국면에서 암약한 것처럼, 북한은 특히 친북(親北) 방향으로의 대한민국 권력 교체를 위해 각종 공작을 펼쳐왔다. 유 원장의 논문 '한국의 대선과 북한의 대남정치공작'은 "북한이 한국의 대통령 선거나 국회의원 총선거 등 권력 재편기 때마다 선거 투쟁 등 대남정치공작을 전개하는 목적은, 기본적으로 대남 전략 목표인 '전 한반도의 김일성·김정일주의화와 공산주의사회 건설'(적화통일)을 달성하기 위한 유리한 정세를 구축하려는 것"이라고 진단한 바 있다.
이 논문은 "즉 북한은 선거라는 합법적인 운동 공간을 활용하여 이른바 전 조선 혁명을 위한 3대(북한, 남한, 국제) 혁명 역량 강화 노선 중 '남한사회주의혁명 역량'을 강화시켜 혁명성사를 위한 주객관적 상황(결정적 시기)에 유리한 환경을 마련하려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이하 해당 논문의 일부분을 옮긴다.
친북(親北) 프락션 전술
이는 합법과 비(非)합법전술을 배합한 반(半)합법 선거투쟁전술로 북한에 이미 포섭되어 제도권 정당에 침투한 거물급 인사나, 북한에 우호적인 인사를 지원하여 당선시키려는 선거 전술이다. 이 전술은 크게 두 가지 유형으로 분류되는데, ①북한에 직·간접적으로 포섭된 인사들을 제도 정치권에 합법적으로 침투시켜 후보 공천을 받게 한 다음, 이를 지원하여 당선케 하는 유형과 ②기존 제도 정치권에서 활동하고 있는 인사 중 북한에 우호적인 인사나 이른바 진보 성향의 인사를 내부적으로 선정하여 전폭 지원하고 당선케 하는 유형(물론 당선 후에 북한에 협조하도록 압력 행사)이 있다. 이는 친북 세력이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는 합법적 활동 공간을 제도권에 구축하기 위한 전형적인 북한의 선거 전술이다.
북한의 프락션 공작은 1949년 5월 제헌 국회의원 13명이 관련된 '남로당 국회 프락치 사건'에서 입증된 바 있다. 북한은 남로당 공작원 이삼혁과 하사복으로 하여금 국회의원 노익환과 이문원을 포섭케 하여, 이 두 의원을 통해 원내 세력을 규합한 다음 북한 노선에 동조하는 외국군 철퇴안을 통과시키게 하는 등 친북 활동을 하다가 검거된 바 있다.
이외 1967년 동백림 사건, 1969년 공화당 국회의원 김규남 간첩 사건, 1989년 국회의원 서경원 간첩사건 및 1992년 조선로동당 중부 지역당 간첩 사건시 민중당 창당 공작 등에서 북한이 프락션 공작을 면밀히 추진해 왔음을 확인할 수 있다.
前 북한 공작원 "김일성, '4~5년 대남 공작 성과가 40년간 한 일보다 많다' 치하"
김동식 전 북한 공작원은 논문 '북한의 대남공작과 국내 종북세력'에서 "우리 사회 내부에 존재하는 북한 추종 세력, 북한을 대변하는 세력으로서의 종북세력은 철두철미 북한 대남공작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대남 혁명의 준비기로 규정하고 '대남 혁명 역량의 보존·축적·장성·강화'라는 준비기 전략 목표 달성을 위해 종북 세력 포섭 등 대남공작을 지속적으로 해왔으며, 바로 이러한 북한의 대남공작에 의해 종북 세력이 양산되었다는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그는 "필자 역시 1990년 5월 제주도를 통해 침투한 후 10월까지 약 6개월 동안 거물급 공작원인 이선실이 살고 있던 서울 동작구 대방동 단독주택에 체류하면서 2명의 운동권 인사를 포섭한 후 그들을 중심으로 2개의 지하당 조직(간첩망)을 구축해놓고 강화도를 통해 복귀한 바 있다"고 말했다. 이하 해당 논문의 일부분을 옮긴다.
"이런 방식으로 북한 대남공작 조직에 포섭된 현지인 즉 지하당 조직원들은 주변 세력들까지 종북 세력으로 만드는 데 결정적 기여를 하였던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김일성도 1992년 당시 노동당 대남공작부서인 사회문화부(후에 대외연락부) 부장이었던 이창선에게 '지난 4~5년간 대남공작부서에서 달성한 성과가 과거 40여 년 동안 해놓은 일보다 더 많다'며 대남공작 성과를 치하했을 정도다.
그렇다면 대한민국 내에 간첩 조직은 얼마나 되고, 또 종북 세력은 과연 얼마나 될까? 물론 이에 대해서는 누구도 정확하게 답변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과거 북한의 대남공작과 종북 세력의 활동 행태를 보면 대체적인 윤곽은 그릴 것이라고 생각한다.
몇 가지 근거로 될 만한 사례들을 언급해보려고 한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북한은 국내 운동권 세력이 전성기를 맞고 있던, 1980년대 후반~1990년대 중반까지의 기간에 10여 개의 대남공작조를 남한에 직접 침투시켜 운동권 인사들에 대한 포섭 공작을 공격적으로 전개한 바 있다. 물론 해외에서도 현지에 살고 있는 교포 또는 유학생들을 포섭하는 공작을 전개하였다.
당시 남한에 침투했던 10여 개의 남파공작조들은 각각 2개 정도(총 20여 개)의 간첩망을 구축해놓고 복귀하였다. 물론 그 이전 시기 즉 1945년~1980년대 중반까지 북한이 국내에 만들어놓은 간첩망이 모두 몇 개인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그런데 80~90년대에 북한이 만들어놨던 20개 정도의 간첩망 가운데 남한조선노동당 중부지역당과 구국전위, 민혁당과 일심회, 왕재산 등 여러 개의 간첩망이 수사기관에 의해 검거되어 파괴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 과정에 노출된 간첩 조직들을 보면 적게는 3~5명, 많게는 100명 정도의 종북 세력이 가담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따라서 1개의 간첩망에 평균 50명 정도의 종북 세력이 가담해 활동한다고 보면 현재 우리 사회에 500~1000여 명 정도의 골수 종북 세력이 활동하고 있다는 계산이 나온다. 물론 이것은 1980년대 중반 이전에 북한의 대남공작에 의해 구축된 간첩 조직들은 제외한 숫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