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91년 한소(韓蘇) 정상회담. 노태우 대통령과 고르바초프 소련 서기장의 모습. 사진=KTV 대한늬우스 유튜브 캡처

26일 서거한 고(故) 노태우 전 대통령의 재임 중 최대 업적은 북한과 소련, 동구(東歐) 공산권 국가들과 관계 개선 및 협력 모색을 감행한 ‘북방외교(北方外交)’다. 노태우 정부 임기였던 1980년대 말부터 1990년대 초는 소련 및 동구 공산권이 붕괴하고 미소(美蘇) 데탕트 분위기가 형성되는 등 냉전(冷戰)이 완화되던 시기였다. 당시 노태우 정부는 88서울올림픽의 성공적 개최를 기반으로 평화와 화합의 분위기를 조성, 외교 노선에도 반영해 평소 견제 관계에 있던 북방 국가들과의 접촉면을 넓혀나갔다. 공식 수교(修交)부터 정치·경제·문화 등 다방면에서의 협력을 추진했다. 

1989년 사회주의 국가로는 처음으로 헝가리와 수교한 뒤, 1990년 소련과 수교, 이듬해 남북 기본 합의서 채택과 남북 공동 UN(국제연합) 가입을 이뤄냈다. 1992년에는 ‘죽(竹)의 장막’이라 불린 중공(中共·수교 이전의 중국)과 수교했다. 퇴임 직전인 1992년 12월 22일에는 베트남과 수교하기도 했다. 노 전 대통령은 임기 5년 동안 총 37개의 공산권 국가와 외교 관계를 수립했다. 일반적으로 대중의 뇌리에는 노 전 대통령과 소련 서기장(書記長) 고르바초프와의 한소(韓蘇) 정상회담 장면이 각인돼 있다. 북한에도 대화와 협력의 손길을 내밀었다. 1991년 상호 존중과 불가침을 기초로 한 ‘남북 기본 합의서’를 채택하고 남북 공동 UN 가입으로 통일과 화해의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노 전 대통령은 남북 관계의 주도권을 쥐기 위해 대북 정책 추진에 있어 ‘강단 있는 면모’를 보이기도 했다. 1993년 문재철 KBS 청와대 출입기자가 쓴 노태우 정권 비화록(祕話錄) 《청와대 비밀 메모》(갑인출판사)에는 당시 노태우 대통령의 말과 공로를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노태우 대통령의 남북 관계에 대한 인식은 88년 올림픽이 끝난 후 유엔총회 연설에 잘 나타나 있다. 

북한을 일방적으로 비방하거나 고립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대결의 시대를 청산하고 화해와 협력을 통한 민족 공동의 번영을 향해 나아가야 하며, 이를 위해 북한의 발전을 돕겠다는 노 대통령의 연설은 북한과 관계가 깊은 사회주의 국가들에도 깊은 감동을 주었다.

처음에는 노 대통령의 남북 관계 개선을 위한 선언을 선전의 일환으로만 여겨 왔던 북한도 여러 경로를 통해 우리 측의 진심을 깨닫게 되자 남북 대화에 임하는 태도에 변화를 보이기 시작했고, 남북 간 대화도 잦아지게 되었다.

서울 올림픽의 성공적 개최와 민주화의 진전, 경제적 성취를 바탕으로 한 자신감은 남북 관계를 종전의 수동적 자세에서 능동적으로 전환시켰고, 동유럽의 개혁 등 동서 화해의 분위기도 남북 관계의 변화에 기여했다.

그동안 남북 고위급 회담의 진전과 남북 기본합의서의 채택 등 많은 변화를 가져왔지만 우리 측이 가장 역점을 두었던 남북 정상회담만은 끝내 성사되지 않았다.

남북 간의 가장 빠른 해결 방법은 남북 최고 당국자가 만나는 일임을 강조해 왔고 공식적인 연설이나 비공식적인 비밀 접촉을 통해서도 남북 정상회담을 촉구해 왔으나 북한은 이에 끝내 응하지 않았다.

노 대통령은 연형묵 북한 총리에게도 남북 정상회담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연 총리! 김일성 주석에게 전하시오. 솔직히 얘기하자면 나로서는 정상회담을 하든 안 하든 손해날 것이 없어요. 김 주석은 나보다 20살이나 많고 나보다 먼저 죽을 것 아니겠소. 김 주석은 우리에게는 6.25 전쟁을 일으킨 전범자로 남아 있는데, 남북 관계를 개선하기 위한 정상회담 한 번 못하고 죽게 되면 그는 영영 역사에 낙인이 찍히고 말 것 아니겠소. 불행했던 과거를 딛고 남북 통일을 위해 뭔가 노력했다면 그나마 역사에 새로이 기록될 수 있지 않겠소. 그럼에도 정상회담을 하기 싫다면 관두라고 하시오. 연 총리께서 이 말을 돌아가거든 그대로 전하시오.......”

그렇다면 노태우 정부의 북방외교 정책은 학술적으로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을까. 이하 본 기사에서는 2011년 《동서연구》 제23권 2호에 실린 〈노태우 정부의 북방정책과 남북관계: 북핵위기를 중심으로〉(장훈각 연세대 교수), 2015년 《입법과 정책》 제7권 1호에 실린 〈노태우 정부의 ‘북방정책’의 주요 결정요인 검토 및 재평가 가능성 – 분석수준별 평가 및 대중적 인식의 괴리 탐구〉(안종기 고려대 박사, 박선령 고려대 석사) 등 학술논문을 토대로 노태우 정부의 북방외교 정책을 재조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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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해당 논문 2종 캡처

우선 장훈각 교수는 위 논문에서 “노태우 대통령의 자서전에서 지적하고 있듯이 북방정책은 원교근공(遠交近攻)을 그 핵심적 내용으로 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남북관계의 개선과 통일을 위한 대북정책과 대외정책을 기초로 하는 전방위적인 비전이었다고 할 수 있다”며 노태우 정부의 북방정책 목표를 세 갈래로 분석했다.

노태우 정부의 북방정책은 당초 다음 세 가지를 그 주요 목표로 설정했다. 하나는 미국과 서방을 중심으로 하는 기존의 외교에서 공산권을 포함하는 전방위적 세계 외교로의 확장이다. 둘째는 시장 개척이다. 공산권까지도 우리의 시장으로 확대시킴으로써 지속적인 경제 성장 및 활로를 개척하고자 하였다. 셋째, 북한의 우방과 협력함으로써 북한을 압박하고 북한으로 하여금 우리와의 협력의 장으로 이끌어 냄으로써 통일의 환경을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또한 이러한 목표를 달성하는 행동원칙으로서 북한의 고립화를 지양하며, 북방정책과 통일정책의 연계 중시, 정치와 경제의 연계, 미국 등 기존 우방과의 관계 중시, 국민적 합의 중시 등의 다섯 가지 원칙을 기초로 했다.

장 교수는 “노태우 대통령은 공개적이고 선언적인 압박을 가하는 동시에 북한과의 비밀 외교의 창구를 개설하고 이를 통해 남북정상회담을 지속적으로 추진하는 전략을 구사함으로써 남북한에 상호 의사소통과 탐색의 창구를 열어놓고 있었다. 1983년 아웅산 테러 이후 소위 ‘88라인’으로 불리던 박철언과 한시해의 접촉은 1991년 3월까지 모두 43차례나 달했다”며 “특히 1988년 11월에는 박철언을 비롯해 강재섭, 강근택, 김용환이 비밀리에 평양에 가 남북한 통일방안과 대통령의 정상회담 성사의지 등의 내용이 담긴 노태우 대통령의 친서를 전달하기도 했으며, 북한 특사의 서울 방문을 성사시키는 데 기여하기도 했다”고 설명했다.

장 교수는 “북방정책은 세계적 탈냉전 초기의 국제정세의 근본적 변화를 그 배경으로 한국외교의 대서방 의존도를 줄이고 적극적 시장개척을 수반하는 전방위 지향적 정책을 의미하는 동시에 북한의 개방과 개혁을 유도하여 평화적이고 우리에게 유리한 통일환경을 모색했던 공격적 통일정책이었다”면서도 “그러나 이 북방정책은 북한의 핵 개발과 이로 인한 갈등이 극도로 심화되는 것과 같은 위기를 관리하기에는 몇 가지 문제들을 지니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고 지적했다.

〈그 첫째는 노태우 대통령의 북방정책 시행 초기 소련과 중국을 비롯한 동구권 사회주의 국가들과의 국교 정상화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을 뿐, 그들을 통해 북한의 선택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정치적 레버리지의 강화를 위한 정책적 고려들은 부족했다. 헝가리, 소련과 중국과의 수교 과정을 보면 국교 정상화의 절차적 문제에 중점을 두고 정부 기관의 소수 인력에 의한 비밀 외교를 바탕으로 진행됐으며, 그 과정과 내용은 상대 국가에 필요한 자본을 제공하고 이들과의 국교를 체결하는 형식을 띠고 있었고 주로 사회, 경제, 문화적 교류의 원활화를 위한 절차적 문제들을 해소하는 것에 중점이 두어졌다.〉

한편 안종기·박선령 고려대 학자들은 위 논문에서 “반공주의(反共主義)에 입각한 공산권 국가들과의 적대적 관계를 탈피하고 공식적인 외교관계를 수립했다는 점에서 노태우 정부의 ‘북방정책’은 매우 새롭고 중요한 사건이며 과정이었다”며 “이를 두고 한국 외교사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고까지 평가하는 이유는 북방정책이 한소 수교와 한중 수교 및 대북 관계의 새로운 전환으로 이어지는 과정과 방식에서 한국 외교정책의 자율성 제고가 정점에 달했기 때문”이라고 평가했다.

두 학자는 “특히 소련, 중국과의 수교와 함께 남북기본합의서 등 매우 가시적이고 영향력 있는 성과가 산출되었다는 점에서 노태우 정부의 ‘북방정책’의 역사적 의미를 찾을 수 있는 것”이라며 “또한 북방정책을 공산권 국가와의 경제협력을 통한 경제이익의 증진과 외교 정상화 외에 궁극적으로는 남북한 통일의 실현을 위한 정책과 방법으로서 바라볼 수 있다는 점, 나아가 북방정책의 숨은 목표는 바로 당장의 통일은 아니더라도 상당 기간 북한을 남한의 영향력 하에 두려는 목표를 갖고 진행된 대북정책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는 점에서 노태우 정부의 전략적 접근을 인정하기 위한 충분한 근거가 존재한다”고 분석했다.

냉전의 분위기가 남아있던 시기에는 주로 북한과의 전향적 관계 개선을 위한 구체적 노력을 기울였고 국제 환경의 변화에 따라 시야를 북방으로 돌려 외교 무대 자체를 확장하고자 했었던 시도와 성과들, 그리고 이를 역으로 활용하여 북한과의 관계를 풀어나가는 지렛대로 사용하는 과정에서 보여준 장면들은 분명 시대의 흐름과 맞물려 큰 그림을 적극적으로 구상하고 실천하는 데서 기인한 것이라고 볼 만하다. 

물론 그 과정에서 다양한 국민들과 시민사회의 목소리 경청 등은 거의 없었으므로 민주적이었다고 평가하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자주적이고 자율적인 외교를 향한 열망이 존재했다는 것은 인정해야 하며 이것이 이후 국제 체제의 환경 변화와는 독립적으로 ‘북방 정책’을 실질적으로 이끌어간 동력이 될 수 있었다고도 볼 만하다. 이 같은 판단의 가능성을 제공하는 단초로서 1987년 대통령 선거 기간 중 후보의 상태에서 미국을 방문하여 존스홉킨스 대학에서 강연했던 당시의 노태우 후보의 언급을 들 수 있다. 

그는 한국 젊은 층의 반미(反美) 성향에 대해 “그것은 반미가 아니라 잃어버린 자존심의 문제”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이후 6공화국 출범과 함께 민족의 자존과 자주 외교를 강조하면서 북방 외교에 내재되어 있는 기본 철학이 바로 민족의 자존이었다는 점을 일관되게 강조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