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50년 12월 흥남철수작전 당시 '자유를 향한 배'에 승선하는 피란민들. 사진=월간조선

오는 24일은 흥남철수작전이 완료된 지 71주년 되는 날이다. 미군은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 12월 14일부터 12월 24일 사이 10일간 함경남도 흥남 부두에 모여든 10만여 명의 피란민들을 배에 태워 구해냈다. 크리스마스 이브에 완료된 작전으로 '크리스마스의 기적'이라 불린다.

영화 '국제시장'(2014년), 김동리의 단편소설 '흥남철수'(1955년) 등 흥남철수작전을 다룬 국내 작품은 당시를 아비규환의 상황으로 묘사하고 있다. 당시 실제 상황은 어땠을까? 

국내외 자료를 분석하고 실제 피란민들의 증언을 수집해 당시 피란민들은 미군과 국군을 도우며 질서정연하게 움직였음을 밝힌 논문이 있어 소개하고자 한다. 조진수 연세대 통일연구원 전문연구원과 김석향 이화여대 북한학과 교수가 2019년 1월 《사회과학연구》 논문에 게재한  '흥남철수작전의 재구성: 아비규환과 질서정연 사이의 진실 재조명' 논문.

유엔(UN)군 총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Douglas MacArthur)는 6·25전쟁 당시 중공군의 개입으로 후퇴를 결정하면서 1950년 12월 8일 흥남철수를 명령했다. 작전을 총지휘한 미 10군단장 에드워드 아몬드(Edward M. Almond)는 처음에 흥남으로 몰려드는 피란민을 군 수송선으로 철수시키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미 10군단 민사부 고문 현봉학 박사와 국군 1군단장 김백일, 미 해병 대령 에드워드 포니(Edward H. Forney) 등의 설득으로 14일 피란민 철수를 결정했다. UN군 사령부가 민간인 흥남철수를 승인했던 가장 큰 이유는 현봉학 박사와 포니 대령이 피란민 대부분은 선교사들 활동으로 기독교로 개종한 사람이라고 피력했기 때문인 것으로 전해진다.

흥남철수는 선박 109척으로 UN군 10만 5000명, 피란민 9만 8100명, 각종 차량 1만 7500대, 화물 35만t(톤)을 193회에 걸쳐 후송한 대규모 합동 작전이었다. 마지막으로 피란민을 태운 배가 영화 '국제시장'에도 등장하는 화물선 메러디스 빅토리호(SS Meredith Victory). 빅토리호의 선장 레너드 라뤼(Leonard LaRue)는 군수 물자 25만 톤을 버리고 피란민 1만 4000명을 배에 태웠다. 빅토리호는 23일 흥남 부두에서 출항해 성탄절인 25일 거제도 장승포항에 도착한다. 마지막 피란민선까지 무사히 떠나보낸 아몬드 미 10군단장은 흥남 부두의 모든 시설과 배에 싣지 못한 군수 물자를 폭파한 뒤 24일 군함 마운트 맥킨리(Mount Mckinly) 호를 타고 흥남항을 떠나며 작전을 마무리했다.  

철수 작전 중에도 중공군과 북한 인민군의 계속되는 공격에 미군의 엄호 포격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진행됐다. 끊이지 않고 들려오는 포격 소리, 배를 타느냐 못 타느냐에 따라 생사가 나뉘는 상황에서 피란민들은 무질서해질법 했지만 침착하게 질서를 유지했다고 한다.

함남 북청군 출신으로 흥남철수 당시 20대 초반이었던 손동헌 씨는 12월 19일 일본 국적의 화물선 '도바다마루' 호를 타고 월남했다. 손 씨는 논문 연구진과의 인터뷰에서 당시 흥남 부두 상황은 아비규환이 아니었다고 증언했다. 배를 탈 때도 질서정연하게 100명씩 줄을 서서 빠르게 올랐다고 한다. 

손 씨의 증언은 미국 정부에서 비밀 해제한 10군단 사령부 지휘 보고서 내용과 일치한다. 미 민사작전 부대는 12월 14~20일 동안 흥남 지역으로 끊임없이 밀려드는 피란민을 10군단 소속 한국인 헌병들과 정보팀의 도움을 받아 서호진으로 이동시켰다고 서술했다. 이들을 100명 단위로 편성한 후 그룹마다 한 명의 책임자를 둬 통솔하고 적절한 때에 이동시켰다는 것이다.

손 씨와 같은 고향 출신인 김영수 씨는 흥남철수 당시 10대 초반 학생이었다. 그는 빅토리호를 타고 월남했다. 김 씨는 12월 23일에 마지막 배를 탈 때까지 드럼통을 밀면서 UN군을 도왔다고 한다. 

이는 아몬드 미 10군단장의 증언과도 일치한다. 아몬드 장군의 외손자 토마스 퍼거슨(Thomas Fergusson) 대령이 공개한 녹취록에 따르면 아몬드 장군은 피란민이 2인 1조로 50갤런 기름 드럼통을 굴리며 배에 실었는데 이들이 없었으면 이 물자는 불에 태웠거나 중공군에게 빼앗겼을 것이라며 피란민이 철수작전에 큰 도움을 줬다고 말했다. 그는 또한 흥남철수작전 당시 상황은 아비규환이 아니었다며 무엇보다 피란민이 UN군 지시를 잘 따랐다고 설명했다.

흥남철수 때 아몬드의 부관이었던 알렉산더 헤이그(Alexander Meigs Haig Jr.) 전 미 국무장관은 "나는 아몬드 장군의 통신장비와 지프차와 기타 물건을 화물선에 싣고 마지막으로 떠난 사람들 중 하나였다. 전반전으로 큰 위험 없이 질서정연하게 진행된 철수였다"고 회고했다. 

흥남철수 마지막까지 피란민을 관리했던 미 육군 3사단의 로버트 소울(Robert H. Soule) 장군은 "이들은 자신들을 빨리 구출해주지 않는다고 항의하지도 않고 다른 소란도 없었다. 다만, 그들이 처음부터 UN군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무작정 따라온 것처럼 끈기와 인내를 가지고 기다리고 있었다"고 증언했다.

피란민들이 목숨을 걸고 북한을 떠나 대한민국으로 향해야만 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이유는 단 하나 '자유'였다. 오늘날 북한 주민들이 자유를 찾아 목숨을 걸고 탈북하듯 말이다. 논문은 김영수씨의 증언을 전하고 있다.

"우리는 어릴때 부터 말도 마음대로 못했어요. 국민학교(인민학교) 때 친구들끼리 '김일성이 어떻대'하면 그 이튿날 아주 혼나. 그런 세상이었거든. 그런 세상에 국군이 들어갔기 때문에 얼마나 해방이 됐겠어? 진짜 해방감을 느끼지. 전부 철수하려고 하지. 할 수 없이 남아있는 거지요. 더군다나 이 철수한 사람들은 말이죠, 소위 말해 부르주아, 노동자, 농민인데 실제로 노동자, 농민을 착취하는 것이 공산당이라고요. 그런 무식한 사람들을 완장을 채우고 앞장세우니까 온 동네 다 그렇게 죽인 거지. 죽이니까 피해서 살려고 나오는 거지. 목숨을 걸고 나오는 거지. 그 대신 내가 어릴 때 그 나올 때 마음이 어땠냐면, 곧 다시 간다, 누구든지 모두 다들 국군이 갔다가 금방 오니까 중공군 때문에 나가지만 다시 올라간다, 한 달 내지 두 달 내지 계산하고 나온 거지. (…) 그래가지고 다시 배가 거제도로 갔거든요. (…) 거기서 그렇게 고생을 해도 말이죠, 이 나온 사람들이 말이죠, 전부 다 밝아. 왜 그렇겠어요? 말을 함부로 할 수 있는 게, 말을 함부로 못 하는 억압에서 벗어난 것이지. (…) 이 자유를 만끽하느라고 전부 고생해도 전부 얼굴이 밝아. 내가 어릴 때도 그런 걸 느꼈고 우리 친구들도 다 마찬가지야."

논문의 연구진은 손동헌 씨에게도 왜 평양에서 강계로 이동하는 중에 탈출을 결심했는지 물었다. 손 씨는 계급 성분이 좋지 않았지만 기독교인은 아니고 지식인이었지만 전문기술자였기에 탈북할 이유가 적었다. 질문을 받고 손 씨는 외국 매체와 인터뷰한 자료를 보여주었다고 한다. 그 책에 탈출 이유가 짧게 나온다. 그 이유는 '자유로운 삶'이었다.

논문은 결론에서 "블록버스터 전쟁 영화나 소설책에나 나올 법한 전쟁과 철수작전 이야기가 고작 약 65년 전 이 땅에서 일어났으며 그 이야기는 평범한 두 구술자를 넘어 10만여 명이나 되는 피란민의 개인사라는 사실이 숙연하게 만든다"며 "연구진을 더욱 숙연하게 만든 사실은 흥남철수 때 같은 수의 피란민들이 선박 부족으로 군 수송선을 탈 수 없었다는 점"이라고 전했다.

그러면서 "이 사건을 겪고 기억하고 이야기하는 사람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 그러나 분단의 상처는 여전히 견고하고 단단하다"며 "이 논문은 흥남철수를 겪은 평범한 피란민과 이들을 도와준 사람들의 마음을 다시 돌아보는 데 의의를 두고자 한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