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15일 윤봉길 의사의 손녀 윤주경 국민의힘 의원(전 독립기념관장)이 주최한 ‘대선 보훈정책 제안 및 기조강연’이 국회에서 열린 가운데, 국민의힘 중앙선대위 소속 인사들이 참석해 보훈 정책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연설을 했다. 김종인 총괄선대위원장은 “어떻게 하면 (국가를 위해 희생한) 사람들이 제대로 생존할 수 있고 발전할 수 있는가, 길을 열어주는 게 국가의 사명”이라며 “아직도 어려운 환경에서 나라에 불길한 일이 일어날 때마다 스스로를 희생하고 있는 사람이 많다. 이런 사람들을 제대로 기르지 못하면, 자라나는 젊은 세대가 미래를 위해 뭘 할 것인지를 정치는 심각하게 생각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원희룡 정책총괄본부장은 현 정권의 보훈 정책을 비판했다. 그는 “문재인 정부는 보훈 영역에서까지 국민을 편 가르기로 분열시키고 국가 정체성을 멋대로 가위질해 편집하고 있다”며 “산업화와 민주화 역사에서 국가와 국민을 위해 공헌하고 희생한 모든 분을 기리고, 윤석열 후보는 제대로 된 국민 통합적 보훈 정책으로 국민들에게 다가갈 것”이라고 말했다.
문재인 정부의 보훈 정책은 학계(學界)에서도 ‘국가정체성 문제’의 측면에서 비판의 대상이 된 바 있다. 2019년 발간된 《한국보훈논총》 제18권 제2호에 실린 김주환 경기대 국제산업정보학과 교수의 논문 〈문재인 정부의 보훈정책: 보훈이념의 가치와 국가정체성을 중심으로〉가 일례(一例)다. 김 교수는 이 논문에서 “문재인 정부가 내세운 보훈 정책의 상징인 ‘따뜻한 보훈’, 보훈 가족에 대한 존중, 국가유공자들을 대하는 대통령의 낮고 겸허한 자세 등은 국민에게 큰 감동을 줬다”면서도 “이러한 감성적 접근은 그 자체로 훌륭한 것이지만, 정책의 내용에서 문재인 정부 보훈 정책은 국가정체성을 확립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지고 있는가에 대해서는 논란이 크다”고 지적했다.
김 교수는 “문 대통령은 당선 이전부터 이명박·박근혜 정부가 추진한 건국절 제정과 국사 국정교과서 채택을 반대하고, 5·18 기념식에서 ‘님을 위한 행진곡’ 제창 불허를 비판했으며, 당선 직후에는 애국에 대한 보훈으로 ‘국가정체성’을 확립할 것임을 약속했다”며 “대한민국의 국가정체성(National Identity)은 대한민국이 이념적으로 어떤 토대에 서 있는가를 나타내주는 것이다. 특정 세력이나 특정인이 주장하는 이념은 국가정체성이 될 수 없으며, ‘국민적 합의’가 이뤄진 것을 토대로 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김 교수는 국가보훈기본법을 근거로 보훈이념에 내재된 3대 가치를 ‘민족독립, 국가수호, 민주발전’으로 설명했다. 그에 따르면 보훈이념의 3대 가치 중 ‘민족독립’은 일제에 의해 훼손된 민족의 본원적 일체성을 회복하려는 ‘민족정체성’을, ‘국가수호’는 주로 대한민국 정부 수립(혹은 국가 건설)에 대한 북한의 방해 공작이나 북한과의 전쟁, 그리고 북한의 안보 위협 하에서 대한민국을 건설하고 지켜내야 했던 것을 의미하는 ‘대북정체성’을 말한다. 또한 ‘민주발전’은 자유민주주의를 토대로 하는 ‘체제정체성’을 뜻한다. 김 교수는 “보훈 정책과 국가유공자 선정은 보훈이념으로부터 도출되는 국가정체성의 3가지 요소들 간의 통합성과 조화를 전제로 하며, 국가정체성과 괴리돼서는 안 된다”고 밝혔다. 이하 김 교수가 규정한 문재인 정부 보훈 정책의 4가지 기조다.
① 보훈 정책을 통해 국가정체성을 확립한다.
② 과거 이명박박근혜 보수 정권의 보훈 정책이 군인 중심의 ‘국가 수호’ 가치에 편향된 보훈 정책이라면 문재인 정부는 ‘민족독립’ ‘국가수호’ ‘민주발전’ 3가지 가치의 균형적 예우와 선양을 추구한다.
③ 상대적으로 소홀히 다뤄진 ‘민족독립’의 가치를 선양하기 위해 독립운동가들 중, 해방 이후 사회주의 활동을 했다 하더라도 북한 정권 수립에 직접적 기여를 하지 않았다면 서훈(敍勳)한다.
④ ‘민주발전’의 가치를 선양하기 위해 과거 5·18민주화운동에 대한 왜곡을 차단하며 ‘민주화보상법’에 의해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된 사람들을 민주유공자로 승격시켜 국가보훈체계로 편입시킨다.
김 교수는 이 중 ‘세 번째 기조’가 내포한 문제점을 지적한다. 그는 “일제하 독립운동자이면서 사회주의 계열(무정부주의, 공산주의 포함)에 몸담았던 사람들과 해방 이후에도 사회주의 운동을 했던 사람들에 대한 서훈 문제는 보훈 정책에서 예민한 문제”라며 “이는 대한민국의 국가정체성의 문제와도 연결된 사안이기 때문이다. 사회주의에 대한 스펙트럼이 넓어 어디까지가 서훈 대상인가 그 경계를 정하는 것은 쉽지 않다”고 논했다.
“노무현 정부의 ‘사회주의 국가 건설을 목적으로 한 활동에 주력했거나 적극 동조한 자’라는 기준이나, 문재인 정부의 ‘광복 후 행적이 불분명한 자, 사회주의 활동 경력이 있는 자라도 북한 정권 수립에 직접 기여하지 않았다면 포상할 수 있다’라는 기준은 ‘이현령비현령(耳懸鈴鼻懸鈴)’ 식이어서 보훈처의 자의적 판단이 개입할 소지가 다분하다. 반(反)대한민국적 활동을 한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들이 대한민국의 국가유공자로 서훈될 위험성을 열어준 것이다.
특히 ‘적극’ ‘주력’ ‘직접’ 등의 용어는 그 정도를 판단하기에 대단히 애매한 기준이다. 소극적, 보조적, 간접적으로 사회주의 국가 건설을 목표로 활동했거나 북한 정권 수립에 기여한 사람은 서훈이 허용된다는 의미로 해석될 소지가 있기 때문이다. 국가유공자 서훈에서 하나의 사례를 잘못 처리하면 되돌리기 힘들고, 그것이 전례(典例)가 돼 비슷한 사안에 대한 형평성 문제가 제기되고, 끊임없는 민원이 발생하는 문제보다 더 심각한 것은 국가정체성을 훼손하기 때문이다.”
김 교수는 “노무현 정부나 문재인 정부 모두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에 대한 서훈 기준이 애매하기는 마찬가지다. 해방 후 공산주의 운동은 해방 초기에는 우후죽순(雨後竹筍)으로 좌익단체(左翼團體)가 난립하고 노선도 다양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북로당과 남로당으로 구심력이 형성돼 결집되고 결국에는 민주선거이자 남한 단선인 5·10총선거를 지지하는가 아니면 북한식 각본선거를 지지하는가로 단순화됐다”며 “해방 후 정치사회적 환경과 이념이 복잡했고, 각종 이념의 경계가 모호하긴 했지만 일제하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에 대한 서훈은 정치 활동 시기, 프롤레타리아 독재와 사유재산 철폐 승인 여부, 북한 정권 수립에 기여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판단해야 한다”고 충고했다.
김 교수는 “과거 정부에서 나타난 ‘국가수호’ 가치 중심의 보훈 정책을 비판하고 보훈이념의 3가지 가치를 균형적이고 조화롭게 예우하고, 선양하고자 하는 문재인 정부의 정책 목표는 실제 적용 과정에서는 ‘민족독립’이나 ‘민주발전’의 가치에 경도됐고, ‘대북정체성’을 훼손하거나 ‘국가수호’ 가치를 경시하는 역(逆)편향을 드러낸다”며 “보훈 정책에서 보훈이념의 특정 가치에 경도되거나 보훈이념의 가치들 간 충돌이 일어나게 해 국가정체성 논란을 가져오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비판했다.
김 교수는 “문재인 정부는 보훈이념에 내재된 3개 가치의 균형적 예우와 선양을 통해 국가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한 목표가 이전 정부의 ‘보훈적폐’를 역방향에서 재생산하는 것은 아닌지, 국민 통합에 기여해야 할 보훈 정책이 갈등을 유발하는 것은 아닌지 출범 이후부터 현재까지의 보훈 정책을 평가해야 한다”며 “국민과 함께하는 보훈을 더욱 공고히 하되, ‘국가수호’의 가치를 소홀히 한다거나, ‘대북정체성’을 훼손한다는 비판에서 벗어나기 위한 정책 조정이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조갑제 조갑제닷컴 대표(전 《월간조선》 대표·편집장)는 저서 《대한민국 최후의 날》(조갑제닷컴, 2018)에서 이렇게 일갈했다.
“대한민국의 존립을 보장하는 두 가지 이념적 기초는, 대한민국만이 민족사의 정통국가요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국가라는 민족사적 정통성과 반공자유민주적 정체성이다. 이 정통성과 정체성은 어느 날 갑자기 생긴 것이 아니라 건국과 호국, 근대화와 민주화의 과정을 거치면서 한국인의 피 땀 눈물로 형성된 불가침의 성역이다. 물론 헌법 개정으로도 바꿀 수 없는 국체(國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