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를 사이에 두고 미국과 러시아가 갈등을 빚고 있다. 우크라이나에 대한 군사 위협을 중단하라는 미국의 경고에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동진(東進)부터 중단하라고 요구했다.
우크라이나를 둘러싼 미국과 러시아 간의 충돌은 비단 최근에 발생한 일이 아니다. 우크라이나는 서방 세력과 러시아 사이의 지정학적 단층대(geopolitical fault line)에 낀 중간국(middle power)으로서 1990년 탈냉전 이후 줄곧 양 진영 간 갈등의 한복판에 있었다.
우크라이나가 유라시아 대륙의 서부 지정학적 단층대에 있다면, 한국은 미중 패권 경쟁이 벌어지는 동부 지정학적 단층대에 속한 중간국이라 할 수 있다. 미국과 러시아 사이에서 중간국적 딜레마 상황에 놓여왔던 우크라이나의 사례는 미중 사이에서 생존 전략을 찾고 있는 우리나라에 시사점을 주고 있다.
우크라이나의 사례를 분석하고 한국에의 시사점을 밝힌 논문이 있어 소개하고자 한다. 신범식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가 지난해 2월 국제정치·지역학 학술지 《국제·지역연구》에 게재한 '지정학적 중간국 우크라이나의 대외전략적 딜레마' 논문.
신 교수는 서문에서 "2014년 러시아의 크림반도 병합 및 그 이후 우크라이나 사태의 장기화에 따른 러시아와 서방 사이의 대립은 소위 '지정학의 귀환'을 화두로 만들었다"며 "러시아와 서방, 특히 러시아와 미국 사이의 긴장 고조는 지정학적 단층대에 위치한 국가들의 운명에 대한 새로운 관심을 환기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이는 비단 러시아와 미국 사이의 문제만은 아니다"라며 "최근 고조되고 있는 중국과 미국 사이의 '전략적 경쟁'의 심화는 지정학적 단층대를 전 지구적 수준에서 활성화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저자는 "중간국으로서 우크라이나의 대외정책은 크게 동-서 사이의 균형을 모색하기 위한 일련의 과정으로 이해될 수 있다"며 역대 정부의 대외정책 변화를 연대기적으로 설명했다.
먼저, 레오니드 크라프추크 정부 시기(1991~1994) 우크라이나는 친서방 정책을 펼쳤다. 이후 레오니드 쿠츠마 정부(1994~2004)는 서방과의 관계 개선을 지속하는 가운데 러시아와의 관계를 강화하며 균형점을 모색하는 모습을 보였다. 2004년 오렌지 혁명 이후 유럽 및 유로-대서양 통합의 필요성을 선언한 친서방 빅토르 유센코 정부(2004~2008)가 집권했다. 이후 다시 러시아와의 관계 개선에 나선 빅토르 야누코비치 정부(2010~2014)가 들어섰다.
2013~2014년엔 야누코비치 정권의 친러시아 정책에 반대하는 우크라이나 국민들이 친서방 정책을 요구한 유로마이단 사태가 일어났다. 그 결과 친서방 성향의 페트로 포로센코(2014~2019) 정부가 탄생한다. 포로센코 친서방 정권에 반대해 우크라이나 크림반도와 동부에서 친러계 주민들이 분리독립을 주장하며 일어난 사건이 2014년 크림 위기였다.
집권 초기 동서 균형 정책을 추진했던 현 볼로디미르 젤렌스키(2019~) 대통령은 최근 러시아의 군사적 위협에 맞서 친서방 정책을 펼치고 있다. 우크라이나의 대외정책은 국내 정치와 국제 정세의 변화에 따라 친러와 친서방 사이에서 갈팡질팡했음을 알 수 있다.
논문은 국내 정치적으로 활성화된 '정체성의 정치'는 민주화 시기에 흔히 나타나는 '외교의 강성화'로 연결되면서 오렌지 혁명과 유로마이단 사태를 전후로 중간국 우크라이나 대외정책의 동-서 사이에서의 균형점을 크게 변화시켰다고 설명했다. 특히 정치 엘리트들의 지향성과 민주화 이후 내부 지지자들의 여론 변동 같은 국내 정치적 요소는 지정학적 단층대의 활성화 같은 외적 조건보다 더 크게 우크라이나 중간국 외교의 변동에 영향을 미쳤다는 게 저자의 분석이다.
신 교수는 "초기 쿠츠마 정권이 러시아와의 관계를 재강화한 점, 오렌지 혁명 연대였던 유셴코와 티모셴코 등의 갈등으로 인해 실각 이후 야누코비치 정권이 서구 일변도의 정책에서 다면주의 정책으로 회귀한 점, 유로마이단 전후 동-서 지방의 대외정책 지향에 대한 균열을 보인 점 등은 이같은 국내 정치적 변동의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며 "중간국 외교가 얼마나 신중하게 관리돼야 하는지 잘 보여준다"고 말했다.
논문은 이런 우크라이나 중간국 외교의 경험은 유라시아 국제정치를 설명하는 세 차원 ▲상층부 강대국 정치와 신거대게임(new great game) ▲중층부 지역주의와 다자협력의 동학(動學) ▲하층부 역내 국가들의 국내 정치 중 국내 정치의 중요성을 잘 드러내 주는 사례라고 설명했다.
저자는 결론에서 "미국과 중국 사이에 위치한 중간국인 한국의 대외정책 지향에 대한 고민은 우크라이나가 처한 서구와 러시아 사이에서의 고민과 구조적으로 유사한 부분이 있고, 국내 정치적인 동학의 구조에선 차이가 있어 보인다"며 우크라이나의 중간국 외교가 한국에게 주는 교훈을 전했다.
신 교수는 첫째로, 한국의 입장에서 새롭고 창의적인 중간국 외교의 모색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그는 "미중이 무역 갈등으로 첨예하게 대립하는 가운데 안미경중(安美經中)이 더 이상 대안이 될 수 없는 상황에서 급격한 편승 파트너의 변경이나 어설픈 균형점 변동은 심각한 지정학적 혼란을 초래할 수도 있다"며 "동북아시아 내 중간국 연대나 소다자협력의 추동 등의 창조적 전략으로 다차원 구도에서 균형을 모색하는 복합지정학적 사고 기반의 대책 마련이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둘째로, 우크라이나 동부의 무장 갈등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경쟁하는 양극 중 일방이 상대방을 완전히 압도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분단과 분할은 강대국들에게 차선의 대안이 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저자는 "우크라이나 동부의 분쟁 지역화, 완충 지대화는 중간국 우크라이나의 축을 크게 변화시키지 않는 한도 내에서 균형을 모색한 서구와 러시아 간 대결의 결과물일 수 있다"며 "이는 분단 혹은 분할이 강대국 간 세력균형 유지를 위한 차선의 대책이라면, 중간국에 입장에서 이를 일거에 타개하기 위해 노력하기보다 분단 구조에서 협력적 공존을 모색하면서 네트워킹을 강화하는 것이 균형점 모색의 근거를 강화하는데 유리할 수 있다"고 말했다.
셋째로, 주변 강대국의 반응을 고려하면서 균형점을 살펴야 한다고 했다. 신 교수는 "서유라시아 지정학 구도에서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에 취한 대응을 중국과 러시아가 북한에 대하여 취할 수 있는지 면밀히 검토해 볼 필요 있다"며 "유사시 강대국 간의 충돌을 막기 위해 한반도의 일부가 우크라이나 동부와 같이 분쟁 지역 내지 완충 지역화가 이루어질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하기는 쉽지 않다"고 경고했다. 그는 "이런 우려가 현실이 되지 않게 하기 위해 중러 간 연대 고리 등에 대한 면밀한 관찰이 필요하며, 북한 급변사태 시 중국과 러시아의 대응에 대한 한국, 일본, 미국의 대응 의지 등에 대한 평가도 이루어져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