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94년 4월 9일 우루과이 라운드 협정에 반대하는 시민 학생 단체들은 보라매 공원에서 집회를 갖고 여의도 국회의사당까지 시가행진을 했다. 사진=조선일보DB

2. 쌀 시장 개방의 시작 -미국의 일본 쌀 개방 요구에서-

우루과이라운드(UR) 협상에서 마지막으로 합의된 의제가 바로 우리 쌀 문제였다. 협상 최종일(1993년 12월 15일)이 다가오면서 GATT의 서덜랜드 사무총장은 12월 12일 한국과 미국 협상대표에게 당장 합의해 오지 않으면 자신 마음대로 숫자를 써 넣고 끝내겠다고 윽박질렀다.

마침내 12월 13일 새벽 1시에 한미간 합의(10년간 1%∼4%의 수입)가 되어 UR 협상이 마무리 되었다. 7년 3개월의 긴 협상의 마지막 걸림돌이 된 안건이 바로 한국의 쌀이었다.

이와 같은 우리의 쌀 시장개방 문제는 어디에서부터 시작된 것일까?

처음부터 미국이 쌀 시장개방을 노린 것은 우리가 아니라 일본이었다. 

거슬러 올라가면 미국의 일본 쌀 시장 개방은 1차 석유파동(1973년) 이후 늘어나는 무역적자를 보전하기 위하여 막대한 흑자를 보인 일본을 상대로 자국의 경쟁력이 있는 농산물 시장개방을 목표로 시작한 데서 비롯하였다. 처음에는 쇠고기, 오렌지, 과즙에 대한 개방을 요구하여 1년여의 협상결과 1978년부터 5년간 수입 쿼타를 늘리는데 합의하였다. 

이어 새로 들어선 레이건 행정부(1981년)의 대일 적자가 일본의 무역불공정에 있다면서 일본 농산물의 자유화를 강하게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여기에 일본의 경제단체들이 대외경제 마찰 개선(1982년 1월 4일 경단련보고서) 요청으로 무역자유화 필요성을 언급하자 미국은 대일 압력에 자신감을 얻어 쇠고기, 오렌지 완전 자유화(1988년 6월)를 합의하고 쇠고기는 1991년부터, 오렌지는 1992년부터 자유화하기로 하였다.

이와 같은 미국의 일본 농산물 자유화 공세는 계속되었으나 쌀에 대해서만은 자제하여 왔다. 이는 미국 농산물의 최대 고객인 일본에게 쌀 개방까지 요구할 경우 일본 농민들의 거센 반발을 우려하여 가급적 언급을 피해왔으며 이를 인지한 일본 농림성도 그다지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었다.

그러나 1981년까지 수출호조로 생산이 활발하였던 미국의 쌀 사정이 82년, 83년의 과잉생산에다 태국과의 가격경쟁력 상실로 수출이 급격히 감소하게 되고, 과잉생산에 따른 30%∼35%의 감산 정책으로 쌀 생산농가의 불만이 불거지게 되었다. 이를 배경으로 하여 미국의 쌀도정업자협회(RMA, Rice Miller’s Association)와 주요 쌀 생산주의 의원들이 움직이고 무역대표부(USTR)도 동조함으로 일본의 쌀 문제가 표면으로 부상하게 되었다. 

드디어 1986년 9월 10일 RMA가 일본의 쌀 수입을 요구하는 내용을 미국 통상법 301조 A항 2에 의거 USTR에 제소하기에 이르렀다. 만약 일본정부가 수입에 동의하지 않을 경우 대통령은 일본 제품에 보복관세나 수량제한 등 가능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것이다. 공교롭게 제소 직후 우루과이 푼타델에스테에서 제8차 GATT협상(86.9.15∼9.19)인 UR협상이 성립되었다.

미국은 일본과의 비공식 협의를 한 후 86년 10월 23일 야이터 USTR 대표는 일본이 앞으로 UR에서 쌀 협의를 표명하였으므로 제소를 기각한다고 발표하고 다음날인 10월 24일에는 일본의 가토 농상도 UR 협상의 구체적 내용에 대하여는 앞으로 다국 간에 결정해 나갈 문제라고 밝혀 미·일간 쌀 분쟁의 첫 회를 마쳤다.

그리고 그 후 약 2년간에 걸쳐 미국은 린 농무장관, 야이터 대표, 슐츠 국무장관 등이 일본의 농상, 외상, 주미대사 등과 쌀 문제를 협의하였으나 일본은 미국의 웨이버 품목(미국도 GATT 승인 하에 20여개 품목의 수입제한을 하고 있었음)등과 다 함께 논의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자 미국의 RMA는 88년 9월 14일에 개정된 통상법 301조를 근거로 USTR에 다시 제소를 하였다. 

이와 같은 재 제소에 대하여 45일 내 가부판단(303조)을 해야 하는 USTR은 88년 10월 28일 조건부 기각을 결정하게 된다. 즉 12월 초에 개최되는 몬트리올 UR 중간평가각료회의(Mid Term Review)에서 일본에게 해결할 기회를 주고 일본이 이를 이행치 않을 때는 재 제소를 권장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양자 간 협의와 보복조치를 취하게 되면 일본 자민당 정부의 기반인 농민들의 반발이 심할 것이 예상 되고, 이는 당시 긴밀한 미·일 관계에 악영향이 미칠 것을 우려하여 미국으로서는 양자 간 압력보다는 UR이라는 다자간 협의를 이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계산이 깔려 있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일본은 2차에 걸친 제소를 통하여 쌀 문제를 UR에서 반드시 해결해야 하는 숙제를 안게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일본은 푼타델에스테 회의에서부터 몬트리올 중간평가회의에 농상이 직접 참여하는 등 적극적으로 쌀 보호 근거를 마련하는데 주력하였다. 그리고 몬트리올 회의가 실패한 후 제네바에서 합의(89년 4일)한 중간평가 합의문에 식량안보조항을 넣는데 적극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러면 우리의 대응은 어떠하였는가?

부끄러운 이야기이지만 우리는 당시까지 UR에서 구체적으로 쌀 개방문제가 논의되는 데 대한 인식이 없었던 것이 사실이다. 물론 미국이 우리에게 직접 쌀 개방을 요구하지 않은 이유도 있다. 실제 우리는 푼타델에스테 회의에 농림부 사무관 1명, 몬트리올 중간평가 회의에는 농림부 과장 1명, 사무관 1명이 참석한 것을 보면 알 수 있겠다. 

필자는 주일 농무관(1982.2∼1986.4) 근무 후 일본의 동향에 관심을 가지고 주시하다가 2차례에 걸친 미국의 일본 쌀 수입제한에 대한 제소를 접하고, 이에 관한 내용을 논문(농촌경제연구원의 계간지 「농촌경제」 1988년 12월호)에 게재하여 그 영향이 우리에 곧 미칠 것이 예상되므로 이에 미리 대비해야 한다고 하였다.(당시 농산통계담당관) 그러나 후일 알게 된 사실은 그 논문 게재를 주선해준 농림부 조일호 국장(당시 농촌경제연구원 파견)이 농림부 고위간부로부터 심한 질책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만큼 당시 쌀 시장개방은 우리에게 생각지도 못할 금기사항이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