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92년초 새로운 협상 체제 다시 시작
91년 12월 10일 던켈 총장이 제시한 최종협정 초안(Draft Final Act. 일명 Dunkel Text)에 대하여 EC, 일본, 한국의 반대로 채택되지는 못하였으나 던켈 총장은 시장접근, 서비스분야에 대한 집중협상과 함께 92년 3월 1일까지 국별 이행계획서(Country Schedule, C/S) 제출을 요청하고, 이에 따라 3월 말까지의 협상 완료 한다는 힘든 일정을 제시하였다. 그리고 2월중에는 집중적으로 Quad(미, EC, 일, 카)회의와 미국과 EC의 고위급(차관급)회의를 개최하였으나 의견차이로 결국 협상이 결렬되었다.
한편 3월 1일까지 제출하라는 각국의 이행계획서(C/S)는 서로 눈치를 보면서 미루다가 4월초까지 제출하는 국가가 많지 않았다. 우리는 또다시 쌀을 포함한 15개 품목의 관세는 빈칸으로 둔 채 제출(4월 10일)하였다. 제출과정에서 다른 부처에서는 91년 초 결정한 쌀 이외 2∼3개만 빼고 제출하자는 의견이 있었으나 농림부는 아직 협상의 마지막 단계가 아님을 강하게 주장하여 그대로 제출하였다. 결국 협상이 부진함에 따라 각국이 제출한 그 계획서는 무용지물이 되고 말았다. 우리가 그때 개선된 국별 계획서를 제출하였다면 우리만 바보가 될 뻔하였던 것이다.
미국과 EC, 합의 위한 노력 기울여
이와 같이 92년 4월 종결이 어려워지면서 제네바의 활동은 부진하고 미국과 EC의 협의 결과만 기다리는 모양이 되자 비난이 두 협상 주역에게 쏟아지게 되어 두 당사국은 다시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특히 미국은 11월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있어 UR 합의가 대선에 플러스가 될 것이라는 점과 EC는 미국과 유량종자(Oilseed) GATT 분쟁에서 패소하여 미국의 보복조치 단계에 다다른 점이 양국의 조기합의 가능성을 높여 주는 요인이 되었다.
미국과 EC는 92년 4월 24일 와싱톤 정상회담(부시 대통령, 드로어 EC 집행위원장, 의장국인 포르투갈 수상)에서 협상계속을 합의하고 미국 의회는 미행정부의 신속협상권(Fast Track Authority)을 93년 3월 2일로 연기하는 조치를 취하였다. 그리고 92년 5월 27일에는 미·EC 고위급 협의(미측 : 베이커 국무, 힐스 USTR, 매디건 농무, EC의 안드리에센 대외담당 집행위원)를 하는 한편 Dunkel 총장은 관세화예외를 주장한 일본(92. 8월말)과 한국(92.9.2∼4)을 방문하여 입장 변화를 설득하는 등 다각적 움직임을 보였다.
미국과 EC 드디어 합의(Blair House Agreement) 이끌어
UR 합의를 대선에 활용하고자 하는 미국(부시 대통령은 지속적으로 유럽 지도자를 만나 설득과 압력을 행사)은 가장문제가 되는 EC에 대하여 유량종자 패소에 따른 보복 가능성을 압박하여 대선일(92. 11. 3)에 시카고 한 호텔에서 매디건 미 농무장관과 맥쉐리 EC 농업담당 집행위원간 합의에 이르게 되었다. 그러나 매디건 장관이 투표하러간 사이 맥쉐리 위원의 보고를 받고 드로어 위원장으로부터 합의 내용이 EC 각료 이사회의 수권 범위를 벋어났다는 전화를 받자 그는 바로 브뤼셀로 돌아가 사표를 던졌다. 이에 미국은 11월 5일자로 3억 달러 상당의 EC 농산물(프랑스, 이태리산 백포도주, 유채유, 밀 글루텐 3 품목)에 200%의 보복관세(패널에 승소한 미국이 보복 권한이 있음)의 부과 조치를 취하였다. 이에 당황한 EC 집행위는 다시 맥쉐리 위원에게 협상 전권을 주어 워싱턴으로 보내 Blair House에서 11월 18∼19일 협상, 11월 20일에 마침내 미국·EC 합의(Blair House Ascord)에 이르게 되었다.
그러나 이 합의 내용은 전적으로 미국과 EC의 문제해결이지 일본이나 우리의 문제해결(관세화 예외)이 아닌 것이다. 그렇지만 UR 협상의 부진이 크게 두 나라 사이의 불일치에서 온 것이므로 두 나라가 합의하면 그때부터는 이를 근거로 다른 회원국에게 전반적인 압력이 가해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던켈 총장은 11월 25일 주요국 대사회의, 26일 공식(TNC)회의를 열어 92년 말까지 협상을 매듭 짓겠다고 하였다. 이미 미국 행정부가 의회로부터 93년 3월 2일까지 신속협상권한을 부여 받아 그때까지는 협상을 끝내야하기 때문이다.
한편 관세화예외를 반대하는 국가들은 2월 7일(17:30) 스위스 대사관에 7개 국가(노르웨이, 일본, 멕시코, 이스라엘, 스위스, 한국, 캐나다)가 모여 향후 긴밀히 협조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실제 공식회의 석상에서 큰 소리로 반대하는 나라는 한국과 일본 정도였다.
일본, 쌀의 관세화 예외 포기할 단계에 이르다
여기에서 한 가지 대외적으로 말하지 못하였던 필자만의 일화를 소개해 볼까 한다. 92년 12월 8일 GATT 회의장에서 만난 일본 측 수석대표인 사와꾸지로 차관급 심의관(필자가 동경주재 농무관 재직 시 그는 농림성 국제부장이었다)은 필자에게 만나자는 제의가 있어 다음날 저녁 로잔느 인근 레만호수가의 일식 “우찌노(內野)”에서 만났다. 그 자리에서 그는 충격적인 이야기를 하는 것이었다. 그는 심각하게 “일본은 더 이상 관세화 예외에 대하여 한국과 공조할 수 없게 되었다. 한국도 별도로 살길을 찾기를 바란다.”는 것이었다. 기존의 긴밀한 협상 공조 체제에서 마지막 단계에 각자의 이익을 추구하는 냉정한 각자도생(各自圖生)의 길로 가자는 것이다.
필자는 속으로 “올 것이 왔구나. 일본이 미국과 우리에게는 말 할 수 없는 이미 모종의 합의를 하고 예의상 우리에게 알려 주는 것이 구나, 그렇다면 일본은 미국에게 어떤 양보를 하였을까?”라고 생각하였지만 그 자리에서는 직접 물어 보지도 못하고 무거운 마음으로 돌아왔다. 이러한 상황을 어떻게 받아 들어야하고 우리는 어떤 행동을 취해야 할지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나오지 않았다.
필자는 그와의 대화 내용을 상부에 보고하지도 않고 전문작성(통상 외국의 인사와의 면담내용은 전문으로 작성하는 것이 상례이다.)도 하지 않았다. 만약 그렇게 할 경우 다른 부처에서 당장 우리도 빨리 양보안을 만들어 미국과 협상에 나서야 한다고 할 것이 뻔히 보이기 때문이었다. 당시 회담장에는 관세화 예외를 위해 여러 나라가 치열하게 움직였기에 더욱 큰 충격이었다.
그리고 93년 12월 UR이 끝나고 난 96년 초 본부 국제농업국장으로 도쿄 출장 갔을 때 시와꾸씨(당시 국산진흥사업단 이사장)와 식사를 하면서 92년 12월 9일의 그의 각자도생의 배경을 물었다. 그는 그 당시 부시 행정부가 너무 강하게 밀어붙여 일본으로서는 쌀의 관세화 예외를 거의 포기 단계였기 때문에 그래도 한국에게는 솔직히 알려 주어야 할 것 같아서 얘기했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필자에 아직까지도 남는 의문점은 “왜 그 당시 미국은 한국에게는 협상요청이나 압력행사를 하지 않았을 까”였다 아마도 일본을 먼저 무너뜨리면 한국은 끝까지 반대하지 못할 것으로 평가하였던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클린턴 인수팀의 협상 중단 요구로 다시 연기
한편 EC는 92년 12월 15일 프랑스, 이태리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행계획서(C/L)를 확정하고 GATT에 제출하는 등 12월 말 종결을 위하여 속도를 내고 있었다.
그즈음 각국의 정치적 변동도 적지 않았다. 미국은 92년 11월 대선에서 민주당의 클린턴이 새 대통령이 되었고, 한국도 12월 20일 대선에서 김영삼 대통령(그는 쌀 개방에 직을 걸겠다고 함)이 당선되었다. EC도 대외담당이 안드리에센에서 레온브리탄으로, 농업담당은 맥쉐리에서 스타이헨으로 교체되었다.
93년 새해를 맞아 1월 5일 필자가 사무국(볼터 농업국장)에 확인한바 향후 구체적 일정이 잡히지 않았다는 것이다. 93년 3월 2일까지 마무리를 위해서는 바쁘게 움직여도 시간이 모자랄 정도인데 크리스마스 전까지 북적이던 제네바가 갑자기 조용해진 것이다. 확인해본 결과 클린턴 인수팀에서 협상 중단 요청으로 미국 대표단이 철수해 버린 것 때문이었다. 다행히도 UR 협상을 신정부에서 하겠다는 것이다.
이미 지나간 이야기이지만 그 당시 부시 대통령이 재선되었거나 신행정부가 부시에게 마무리하도록 하였다면 우리와 일본의 쌀은 93년 초 관세화 유예를 얻지 못하고 바로 개방되었을 것이 분명하였다.
한국과 일본의 쌀 관세화 예외를 이끌어 낸 협상 결과는 클린턴 행정부에게 감사해야 할 것이 아닌가 한다. 이렇게 하여 우루과이 라운드는 또 다시 93년으로 넘어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