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년초 각국의 새 협상 팀과 GATT 사무총장 교체로 협상 종결을 추진하다

먼저 미국의 경우 신 클린턴 행정부의 신임 Kantor 무역대표부 대표는 93년 2월 11일 EC의 Brittan 대외담당집행위원을 만나 미국의 FTA(신속협상권한) 연장을 의회에 신청하겠다고 하고 연내 타결에 강한 의지를 표명하였다.

한편 각국도 새로운 협상 팀을 꾸려 이에 대비하였다. 한국은 제네바 박수길 대사에서 외무부 허승 차관보를 새 대사로 임명(93.3.1일자)하였으며 일본도 우까와 대사에서 엔도 대사로 교체(93.4.3)하는 한편 농업 담당수석대표인 「시와꾸」 심의관(차관급)의 임기를 94년 3월말까지 1년 더 연장(90년 이래 4년째)하였다. 또한 93년 3월 28일 총선을 마친 프랑스는 새 농업장관에 Jean Peuch 상원의원을, 외무장관에 Alain Juppe를 임명하였으며 신임 Balladeur 수상은 93.4.3. 기자회견을 하여 미·EC가 합의(92.11)한 Blair House 협정의 재협상을 천명하여 EC 집행위를 난처하게 하였다. 그리고 93년 6월 30일 임기가 만료된 GATT의 Dunkel 사무총장(12년 9개월 역임)이 유임을 고사하여 아일랜드 출신 Peter Sutherland씨를 새로운 사무총장으로 선출하였다.

한편 클린턴 행정부는 의회에 신속협상권한(FTA, Fast Track Authority)을 93.12.15까지로 요청하여 승인을 받아 협상 추진의 동력을 얻게 되었다. 신임 Sutherland 총장은 93.7.7∼7.8 도쿄 G7 정상회담에서 UR 공산품 합의 결과에 힘입어 7월 14일과 7월 28일 TNC 회의를 소집하여 연말까지의 의욕적 일정 제시와 함께 남은 의제에 대하여 다자 협상 보다 양자협상으로 해결하도록 강력하게 요청하였다.

이제 남은 의제는 미국과 EC의 BHA 재협상과 한국과 일본의 쌀 관세화 예외 문제로 압축되어 해당 국가는 강력한 압박을 받게 되었다.

먼저 EC와 미국의 BHA(92.11.20 합의한 Blair House Agreement) 재협상을 요구해온 프랑스 Balladeur 수상이 베를린을 방문하여 독일의 콜 총리의 동조(93.9.26)을 얻은 후 9월 20일부터 21일 새벽 3시까지 열린 EC농업, 외무 각료회의에서 재협상의 동의를 받아내어 93.9.27부터 미국의 Kantor USTR과 Brittan 위원간 회담을 시작으로 실무 협상이 진행되어 UR 종결 열흘 전인 12월 6일에야 최종 합의를 보게 되었다.

미국과 일본 10월 초 쌀의 관세화 유예를 합의

93년 9월 들어 제네바 외교가에서 일본과 미국이 쌀 관련 협의를 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한국이 이를 처음 확인한 것은 9월 중순 GATT 사무1차장 Laborel(미국출신)과 허승 대사의 만남에서 이다. 그는 허 대사에게 미국과 일본이 8월부터 쌀 관련 협상을 하고 있다고 하면서 합의 가능성이 아주 높으며 그럴 경우 한국만 남게 되어 어려운 처지가 될 수 있으므로 10월 중, 하순에는 쌀 문제를 미국과 협의해야 할 것임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93년 10월 8일 오전 제네바 주재 일본의 엔도 대사가 허 대사에게 비공개를 전제로 일본과 미국이 쌀 관세화를 6년간 유예하기로 합의 하였다고 알려 왔다.

그러나 정확하게 최소시장접근물량(최소의무수입물량)을 얼마나 더 주었는지는 알려주지 않았다. 잠정적으로 결정된 국내소비량의 의무수입물량의 규모는 선진국의 경우 초년도 3%에서 시작하여 6년차에 5%를 수입하도록 되어 있고, 개도국은 초년도 3%에서 10년차에 5%를 수입하도록 되어 있기 때문에 그 수치의 규모가 최대의 관심사였던 것이다.

허 대사는 필자에게 양국 간 합의한 수치를 알아보도록 요청하였다. 이에 필자는 바로 USTR 제네바 대표부의 Thorn 참사관에게 확인하여 초년도에 규정(3%)보다 1% 더 준 4%의 의무 수입물량(MMA)을, 그리고 최종연도인 6년차에는 규정(5%)보다 3% 더 한 8%로 합의한 것을 알려주었다. 그날이 10월 8일 이었으므로 어쩌면 일본, 미국의 당사국외에 한국이 가장 먼저 알게 되었던 것이라고 본다. 우리로서는 쌀이 UR 협상의 최대 관심사였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나중에 알려진 이야기 이지만 일주일 후인 10월 15일에 열릴 예정인 GATT의 시장접근(MA)회의에서 미·일간의 합의가 아닌 MA 협상그룹 의장인 드니 의장의 제안으로 다자화 할 예정이었다고 한다. 아마도 미·일간의 비밀협상을 하였다는 부담을 고려한 정치적 결정이 아닌가 한다. 그 후에도 계속된 일본 정부의 공식 입장은 일관되게 양자 협상결과가 아닌 드니 의장의 제안을 미국과 일본이 받아들인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 미·일 양자 간 합의 결과는 미국도 일본도 아닌 한국 언론에서 제일 먼저 터저 나왔다. 바로 93년 10월 14일자 동아일보 1면 톱 기사로 「일본 쌀 시장 개방」 제하에 “익명의 정부 관료에게 얻은 자료”라고 보도하였다. 이를 외신들이 받아 거꾸로 당사국인 일본과 미국의 신문에 나게 되어 두 나라는 혼란에 빠졌다. 특히 일본 정부는 이를 전면 부인하는 등 큰 소동을 일으켰다. 호소가와 총리는 “정부로서 제안한 일도 합의한 일도 없다.”고 하였으며 하다 농림대신도 “전해진 것과 같은 교섭을 미·일 간에 하였다는 사실도 없으며 생각도 없다.”고 발표하였다.

그리고 10월 15일 오후에 열린 GATT의 시장접근분야 회의에서 드니 의장의 한국 때문에 회의 진행에 차질이 생겼다는 비난성 유감 발언을 한국대표단은 말 한마디 못하고 머리 숙여 듣고 있어야만 하였다. 동 합의내용을 의장의 중재안으로 제안하려는 GATT의 계획이 동아일보 건으로 무산되었기 때문이다. 그 후 미·일 합의 내용은 수면 하로 내려가고 최종 타결이 임박한 12월 6일 회의에서 드니 의장의 중재안으로 양국이 받아들인 형태로 하여 12월 14일 호소가와 총리가 「斷腸の思ぃ」라는 표현으로 받아 들였다.

일본은 의무수입량 절반 정도를 미국으로부터 구매하다

그렇다면 미국과 일본의 협상 결과인 의무구매량(MMA)은 규정(3%→5%)보다 많은 양인 4%→8%로 결정한 결과를 어떻게 처리하였을까하는 의문이 생긴다. 원래 이 의무구매량은 Global Quota(공개경쟁입찰에 의한 구매)로서 특정국가에만 구매하는 물량(Country Quota)이 아닌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일본이 95년부터 구매한 MMA의 47%∼48%가 미국으로부터 구매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즉 미국이라는 특정국가로부터 절반 정도 사들인 것이다. 일본 내에서도 사실상 알고는 있으나 의문을 제기하지는 않고 있었다. 그 후 필자에게 몇몇 일본 학자로부터 미·일 협상 내용을 문의하는 경우가 있었지만 일본 정부의 공식 입장만을 얘기해 주었다. 그러나 2015.2.7.일자 일본농업신문(2면)에 「미·일의 쌀 쉐어 보증의 암거래」라는 제하에 「지금까지도 살아 계속되는 밀약」이라고 당시 미국 측 수석대표인 죠 오마라씨와의 인터뷰(2014년 11월 하순)에서 “일본 정부의 제안을 받아들였다”고 하였다. 그리고 일본 측 수석대표인 시와꾸 지로(당시 차관급 심의관)씨(2015년 2월 3일자 농민신문)로부터 “당시 일·미간에 어려운 협상을 하고 있었고 최종단계에서 미국에게 미국산 쌀을 절반 정도 사주겠다고 제안했다”는 이야기를 하였다는 것이다.

필자도 1999년 3월 21일 워싱톤에서 만난 당시 미국 측 실무수석대표였던 농무부 해외농업처 슈로터 처장으로부터 “미·일간의 신사협정(Gentlemen’s Agreement)이었다”는 답변을 들었다. 역시 협상에서는 그에 상응하는 대가가 따르기 마련이다.

이제 UR 협상이 종반으로 치닫고 있는 93년 10월 하순이 되자 GATT의 Laborel 차장의 말대로 농업분야에서 해결해야할 문제는 한국의 쌀 하나만 남게 되었다.

이와 같은 미·일간의 쌀 협상 결과는 그 후 시작된 한국과 미국 간의 쌀 협상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을 뿐 아니라 우리에게는 보다 유리한 협상 결과를 얻을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