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과 쌀협상 시작

1993년 10월 8일 미국과 일본의 쌀 협상의 합의가 알려진 직후 필자는 본부에 몇 가지를 건의(장관에게 사신)했다.

먼저 미국과 EC의 Blair House 합의의 재협상(프랑스의 요구)은 어려움이 있으나 UR 종결 전에 합의할 가능성이 높으며, 그동안 가장 큰 현안인 미국과 일본이 쌀 관세화 문제를 해결함으로 이제는 우리의 쌀만 남게 되어 미국과의 협상에 나서야 할 때가 되었다고 했다. 또 일본보다 유리한 조건으로 협상이 가능할 뿐 아니라 우리가 개도국 지위를 얻게 될 경우 훨씬 좋은 결과를 도출할 가능성이 높다면서 미국과 협상할 때가 되었다고 한 것이다. 이에 따라 1993년 10월 15일 제네바에서 열린 한·미 국장급 회의에서 11월 첫 주에 고위급 쌀 관련 협의를 갖기로 하였다.

그해 11월 3일 처음으로 양국 쌀 협의(한국 김광희 차관보, 미국 죠오마라 차관보)를 가졌다. 미국 측은 한국이 안을 마련해 오면 협상할 용의가 있다고 했다. 김 차관보는 예외 인정 이외의 대안은 없다고 하여 더 이상의 진전은 없었으나 11월 중반에 재협의를 하기로 하고 헤어졌다. 이는 첫 한·미 고위급 협의라는데 의의가 있을 뿐 아니라 우리로서는 GATT 사무국에 이 문제 협의가 시작되었음을 알려 대외적 압박을 감소시키는 효과도 있었다.

미국, 처음으로 개도국 지위 부여 언급

1993년 10월 29일 한·미 국장급회의에서 슈로터 처장은 처음으로 미 농무성(USDA)의 견해라는 전제하에 한국이 농산물을 100% 양허 할 경우 개도국 지위를 고려해 보겠다는 견해를 나타냈다. 그리고 미 무역대표부(USTR)에는 비밀로 해달라는 전제를 달았다. 그동안 미국은 한결같이 한국의 개도국 지위를 인정하지 않는 발언을 해 왔으며, 이에 EC, 호주 등 많은 선진국뿐만 아니라 브라질 등 개도 국가들까지 동조하여 어려움을 겪고 있었던 터였다. 또한 우리의 개도국 지위여부는 쌀 협상에 아주 큰 결과를 가져다주기 때문에 우리로서는 지대한 관심사였다. 그러나 그 후의 협상과정에서 미국 측은 쌀 협상이 끝나는 단계까지 개도국 인정을 협상의 지렛대(leverag)로 사용하였다.

“사람의 이동을 관세화 할 수 없듯, 쌀 관세화할 수 없다”는 허승 대사의 발언

GATT 사무국은 11월 초부터 본격적으로 각종회의를 활성화하여 종결을 위한 진행을 가속화하였다.

이중 11월 19일 열린 TNC(무역협상위원회) 회의에서 허승 대사가 발언한 “국경에서 사람의 이동을 관세화 할 수 없듯이, 한국은 쌀을 관세화 할 수 없다.”며 쌀을 사람에 비유한 발언은 커다란 파문을 일으켰다. 

“We Koreans consider that rice is vital, and that rice is life. Therefore, we have great difficulties in tariffing rice in trade. In this connection, I would like to invite the attention of this committee to the fact that we have not yet reached an agreement, nor have we discussed how to tariffy the movement of people across boarders, and like-wise we are not able to tariffy rice.”

이와 같은 강성 발언에 놀란 서덜랜드 총장은 11월 22일 특별히 허 대사를 초청하여 강한 우려를 표명하고 지속적인 대미 대화를 촉구하였다.

김 차관보와 일본 시와쿠 심의관 회동 주선

필자는 향후 있을 미국과의 협상에 대비하여 미국의 협상 전략 특히 미측 수석대표인 오마라 차관보에 대한 정보(협상 태도, 능력 등)가 필요하다고 보아, 11월 10일 GATT의 TNC 회의에 참석한 미일 쌀 협상의 주역인 일본 농림성 시와쿠 차관급 심의관(필자의 동경 근무시 지인)에게 11월 하순경 하루 동경에서 김 차관보와 회동할 것을 제안하고 11월 25일 오찬을 함께하는 것으로 정하였다(당시 시와쿠 심의관의 일정은 일본 대표부도 모를 정도로 철저히 보호되고 있었다).

그날 하루 당일 출장으로 일본에 다녀온 김 차관보의 정보(미국의 전략 등)는 그 후 우리의 쌀 대미협상 종결에 큰 도움을 주었다고 하였다(허신행 저 : 우루과이라운드와 한국의 미래. 95. 10. 10. 범무사 P.92∼93).

한·미 협상 이원화(쌀은 장관 간, 여타 품목은 차관보 간)로 진행

93년 12월 1일, 농림부 허신행 장관을 수석대표로 하여 정부 대표단(경제기획원, 외무, 재무, 농림, 상공부의 5부처 차관보)이 서울을 출발하여 12월 3일 오전 EC의 슈타이헨 농업집행위원(부뤼셀)을 만나고, 오후에는 제네바에서 서덜랜드 총장을 만나 설득하였으나 모두 관세화 원칙을 수용하고 그 안에서 융통성을 얻도록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반응이었다. 그리고 미측과 한·미간에 쌀은 직접 장관 간에 하고 기타품목은 차관보 회담으로 진행 할 것을 합의하였다.

1993년 12월 5일 쌀 관세화 10년 유예를 잠정합의

한국의 허신행 장관과 미국 농무부 에스피 장관 간 3차에 걸친 협상(1차 : 12월 4일 10:30부터 1시간 30분간, 2차 : 12월 4일 19:00, 3차 : 12월 5일 10:00부터 2시간) 끝에 잠정합의를 이끌어 내었다. 즉 10년간 관세를 유예하고 최소시장 접근물량(Minimum Market Access, 낮은 관세의 의무수입량)을 초년도 국내소비량의 1%에서 5년차까지 2%, 6년차부터 10년차까지 2%에서 4%까지로 잠정합의하였다. UR 협정문에서는 개도국의 경우 초년도 3%에서 10년차 5%로 되어 있어 한·미 합의 결과는 다른 나라들과 크게 차이가 나는 수치였다. 이 잠정합의는 다른 품목의 협상이 끝 날 때까지 대외적으로 공론화하지 않기로 하였다. 이와 같이 일본과 비교하여 파격적인 대우를 하는 것은 그 동안 한국이 강한 목소리를 낸 한국 쌀의 어려움을 배려한 것이라고 볼 수 있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쇠고기, 오렌지 등에서 일부 품목의 양보를 얻어 내려는 복선도 있었다고 하겠다. 이는 그 후 여타 품목에 대한 차관보급 협의가 부진하자 미국이 쌀 잠정합의에 이의를 제기하는데서 알 수 있었다.

김영삼 대통령, 클린턴 대통령에게 쌀 개방 5년 유예 요청

93년 12월 7일 김영삼 대통령은 미국 클린턴 대통령에게 전화로 쌀을 5년 수입 개방 중단을 요청하는 완전유예(Moratorium)를 요청하였다. 

클린턴 대통령은 이를 에스피 농무장관과 캔터 USTR 대표에게 검토할 것을 지시하였다. 이에 미측은 양국 대통령간의 통화관련 12월 9일 한·미 고위급(차관보급) 회의를 요청하여 이미 쌀에 대하여는 특별히 고려였으므로 5년간의 완전 유예는 어렵다는 입장을 나타냈다.

여타 품목의 협상 난항을 겪다

여타 품목 중 우리에게는 고추, 마늘, 양파, 참깨 등과 쇠고기, 돼지고기, 닭고기의 양허 관세의 인상, 오렌지 등 과일, 유제품의 관세에 있으며 미국은 이들 품목의 낮은 관세와 저율 관세의 의무 수입물량(MMA)에 관심이 있어 좀처럼 이견을 좁히기 어려웠다. 실무회의는 장관회의와 별도로 12월 2일, 12월 3일, 12월 4일, 그리고 12월 6일에 열렸으나 점처럼 이견을 좁히지 못하다가 이어진 협상결과 12월 13일 05시에야 합의하였다. 

12월 8일 GATT 농산물 협정문 Text 배포, 한국 조항은 빈칸으로

드니 의장(MA)은 12월 8일(17:00) G-17 회의에서 일본 조항은 숫자를 제시(4%∼8%)한데 비하여 한국 조항은 초년도 ( )%, 최종연도 ( )%의 빈칸으로 Text를 배포하고 양측(미국, 한국)이 조속 합의하도록 요청하였다.

12월 9일 김영삼 대통령 대 국민 사과 발표

미국과의 쌀 협상이 잠정적으로 결정된 과정(10년 유예, 1%∼4%의 개방)에서 김 대통령은 대선 공약이었던 「쌀 개방 저지」를 지키지 못하게 됨에 따라 「고립을 택할 것인가, 세계로 나아갈 것인가」의 제하의 대국민 사과 담화를 발표하고 국민의 이해를 구하였다.

서덜랜드 총장, 12월 11일 농산물 Text 확정 시도... 12월 12일 빈칸으로 확정

12월 11일 UR 수석대표 비공식회의에서 서덜랜드 총장이 Text 확정을 시도하였으나 한국과 미국의 반대로 무산되고 12월 12일 열린 사무국, 한, 미 3차 협의 시 총장은 3%, 5%를 자신이 써 넣겠다고 하였으나 양국의 반대로 또 다시 무산되었으며, 그리고 12월 12일(21:00), 12월 13일(01:00) 열린 회의에서 일본의 강력한 반발로 한국 조항은 빈칸으로 남겨진 채 협정 안이 채택되었다.

마지막 단계서 일본, 한·미간 합의 반대

12월 13일 열린(10:00) 4차 장관회의에서 미국의 에스피 장관은 일본이 한·미간 합의(10년간 1%∼4%)를 일본과의 차이가 너무 크다고 반대하여 초년도 1% 대신 1.5%로 할 것을 제안하자 이에 허 장관이 강하게 반발하면서 전체 합의사항을 무효로 하겠다고 하기도 하였다. 일본은 협상 초기부터 쌀 관세화 반대에 우리와 공동보조를 취해 왔으나 최종 결과가 한국과의 차이가 많이 나자 자국 내 여론이 악화될 것을 우려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UR 협상 종결

12월 14일 10:00부터 최종 문안 배포에 따른 협의와 이어서 열린 수석대표회의에서 한국 조항은 원안(1%∼4%) 대로 채택되었다. 다만 일본만 “일본의 수락은 국제 정치적으로 어려운 결정이다. 한국 조항의 경우 MMA에 대한 과도한 우대로 문제가 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체적 동의(consensus)가 이루어진다면 반대하지 않겠다.”고 발언하여 추인하였다. 그리고 UR 종료일인 93년 12월 15일 오후(17:00) 회의가 개최되어 19시 36분 서덜랜드 사무총장이 의사봉을 휘둘러 7년 3개월에 걸친 우루과이라운드 협상이 종결되었다. 우리의 쌀 개방 문제가 이렇게 결정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