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농림성의 시와쿠 심의관 한·일 쌀 차이를 묻는 일본기자단에게 “자네들 생각한 대로야”로 답하다

시와쿠 심의관의 에피소드다. UR이 끝나기(1993.12.15) 직전인 1993년 12월 13일 밤, UR협상 마지막 의제인 한국과 미국의 쌀 관세화 유예조치(쌀 최소의무수입물량 (MMA) 10년간 1%∼4%)에 대한 안건을 상정하는 시장접근그룹 회의(의장 드니)가 끝나고 나서였다. 이 회의에서 일본의 시와쿠 심의관은 한국이 일본과 너무 차이가 많다고 하며(일본 6년 4%∼8%인데 비해 한국은 10년 1∼4%로 차이) 이의를 제기하였다. 그동안의 한·일 양국의 긴밀한 공조 체제에도 불구하고 이의제기(Reservation)를 건 것은 의외였지만, 양국 간 차이가 너무 많이 난데에 대한 일본 국내의 정치적 고려(당시 관세화를 반대하는 사회당과의 연립내각) 및 자국대표단 협상력에 대한 국회와 언론의 비난을 염두에 둔 것으로 이해가 갔다. 사건은 회의가 끝난 다음이었다. GATT 본관 입구 쪽 1층 홀은 상당히 넓다. 그날 회의가 끝난 시간은 다음날 새벽 한시쯤이었다. 그 시각 1층 홀 안은 일본의 기자단, 특파원, 방송 카메라맨 등으로 발디딜 틈 없이 꽉 차 있었다. 2층에서 1층 홀 안으로 내려가는 시와쿠 심의관에게 어느 일본 기자가 소리쳐 물었다. “韓國との差は何ですか?(한국과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이는 일본으로서는 가장 큰 관심사항인 한국과 일본의 쌀 의무수입량에 대한 차이가 얼마나 되느냐는 질문이었다. 이에 대한 그의 대답은 “君たちの思った通りだよ(자네들이 생각한 대로야)”이었다.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아니, 어떻게 저런 대답을 할 수 있을까?

먼저 “君たち”는 “자네들”이라는 뜻으로, 아이들이나 부하 등 아래 사람에게 반말할 때 쓰는 호칭이다. 그보다는 조금 나은 “あなたたち”(당신들)나 다소 정중한 말인 “皆樣”(여러분들)도 아닌 그런 말을 쓸 수 있을까? 또한 “한국과 차이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자네들이 생각한 대로”라니, 나로서는 상상도 안 되는 대답이다. 그리고서는 유유히 사람들 틈을 헤치고 나가는 것 아닌가. 내가 더욱 놀란 것은 그가 긴 홀을 지나 문밖을 나갈 때까지 그의 대답에 대해 반론을 제기하거나 소리를 지르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는 점이다. 새벽 1시까지 몇 시간을 기다렸다가 말도 안 되는 한 마디 답변을 듣고 뿔뿔이 흩어지는 그 많은 일본 언론인들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만약 우리나라였다면 어떤 반응이 나왔을까? 그리고 약 3개월 후인 ’94년 3월 23일 저녁 우리 대사관저에서 제네바 주재 외신기자들을 초청하여 리셉션을 한 자리가 있었다. 그 자리에서 나는 평소 안면이 있는 일본 매일신문(每日新聞) 제네바 이토 요시아키(伊藤芳明) 특파원을 만나 그날 그 자리의 상황에 대해 물었다. 직접 그 자리에 있었던 그의 대답에 나는 다시 한 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즉, 그는 “과거에는 관리와 언론기자와의 관계가 그보다 더 심했었는데, 지금은 그래도 많이 좋아진 것이 그 정도”라는 것이다. 1996년 초 동경 출장시 만난 시와쿠씨에게도 그 당시의 상황을 묻자 “내가 그렇게 얘기했었나?”라고 대답했다. 정말 일본은 우리에게 가깝고도 먼 나라인가 보다.

우리는 일본보다 유리한 조건으로  관세화 유예를 얻다

우리나라는 예외 없는 관세화를 나타낸 드쥬 의장 초안(90.6.27)부터 브뤼셀 각료회의(90.12.6), 던켈 Text(90.12.20)에 이르기 까지 일본과 함께 협상이 종료되는 직전까지 끈질긴 협상 끝에 쌀에 대한 장기간의 유예(10년간, 1%에서 4%의 최소시장접근물량을 제공)를 얻어 냈다.

한편 일본은 우리에 앞서 6년간의 유예(최소시장접근물량 4%에서 8%)를 합의하였다. 일본의 합의는 규정에 있는 선진국 6년간 3%에서 5%보다 많은 것으로 특히 이행최종연도의 물량이 8%에 이르게 되어 국내적으로 상당한 부담이 된 것으로 알려졌다. 따라서 일본은 약속된 2001년보다 2년이나 앞당겨 조기(99.4.1)에 관세화를 단행하게 되었다. 그것도 그동안 줄기차게 반대해온 농민단체(전중, 전국농업협동중앙회)에서 먼저 제기하여 농림성이 이를 받아들여 관세화 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2001년까지 유예하지 않고 조기에 관세화한 것은 결국 협상결과가 좋지 않았다는 것을 반증한 셈이다. 그동안 거의 마지막 단계까지 관세화를 반대하였던 캐나다가 선진국 조항인 부속서 5 Section A(일본조항)를 원용하지 않고 관세화로 가게 된 이유가 바로 MMA물량(최종연도에 국내소비량의 8%)이 부담이 된다는 캐나다 농업부 수석대표인 Gifford 국장의 언급(93.12.3일, 한・캐 양자협의시)에서 알 수 있었다.

이에 결국 관세화를 반대하던 캐나다와 스위스는 유예 대신 고율의 관세화를 선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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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 1. 캐나다・스위스의 이행초년도(‘95) 관세

재미있는 사실은 이행계획서의 검증과정에서 이 선진국 조항(부속서 5 Section A)을 원용한 국가가 이스라엘(치즈, 양고기)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더구나 우리는 개도국 지위를 얻게 되어 10년 유예에 최종연도에 재협상을 하여 추가로 10년간 더 유예를 할 수 있도록 되어, 실제 2004년 재협상으로 그 후 10년간(2005부터 2014까지, MMA 4%에서 7.99% 제공)유예하여 결국 20년간 쌀 개방을 하지 않은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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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일본의 쌀 최소시장접근의 비교>

위 도표를 보면 일본과 한국의 쌀 의무수입량(MMA)에서 상당히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일본은 선진국의 의무수준(6년에 3%→5%)인 Line B 보다 높은 Line A(6년에 4%→8%) 수준으로 협상하였고 한국은 개도국의 의무수준 Line C(10년에 3%→5%)보다 낮은 Line D(10년에 1%→4%) 수준으로 협상하였던 것이다. 이 부분에서 왜 일본이 협상의 마지막단계에서 한국과 미국의 합의 결과를 그토록 반대하였는지를 알 수 있으며, 또한 일본이 조기 관세화를 단행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지 않았나 생각한다. 

한편 우리는 검증과정에서 필리핀이 소위 한국조항인 부속서 5 Section B를 쌀에 대하여 원용한 것을 알게 되었다. 물론 이의를 제기한 국가(미국 등이 예상됨)에게 대가를 지불한 것으로 알고 있다. 결국 이스라엘과 필리핀은 직접 협상에는 참여하지 않고, 다른 국가(일본과 한국)가 온 힘을 다하여 만들어 놓은 상차림(협상 결과 Section A,B)에 수저만 들고 앉아 식사를 같이 한 셈이 되었다. 이는 협상의 속성을 그대로 보여준 사례라 할 수 있겠다. 

글=최용규 전 세계농정연구원 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