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해외농업처 슈로터 처장, 자국산 쌀의 특별 구매를 요청하다
93년 12월 15일 우루과이라운드가 끝난 지 1년여가 되는 94년 10월 31일, 제네바 USTR 대표부의 손(Thorn) 참사관으로부터 미국 농무부 슈로터 해외농업처장이 제네바에 오게 되어 필자와 11월 3일 만나자고 요청해 그날 17시에 USTR 대표부에서 그를 만났다. 그 자리에서 슈로터 처장은 ’93년 12월 13일 한·미 농업장관회의에서 허 장관이 약속한 일정 부분 미국산 쌀의 구매 문제를 제기하면서, ’95년 MMA 물량 수입 시 이를 반영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에 필자는 우리는 ’93년 12월 15일 협상결과인 문서로 약속한 사항을 충실히 이행할 것이라고 답했다. 아울러 당시 허 장관으로부터 그러한 이야기를 들은 바도 없을 뿐 아니라, 이미 우리는 협정문 부속서에 명시한 대로 타 분야에서 이에 상응하는 양보를 하였기 때문에 더 이상의 혜택은 줄 수 없음을 분명히 하였다. 그리고 오늘의 면담 내용을 상부에 보고하거나 본부에 연락하지도 않을 것임을 명확히 밝혔다. 사무실에 돌아온 필자는 그날의 면담 내용을 대표부 내에도 알리지 않고, 본부에도 전문으로 알리지 않았다. 만약 그렇게 할 경우 국내에서 문제가 커질 뿐 아니라, 일부에서는 미국산 쌀을 구매해 주어야 한다는 의견이 나올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었다. 후술하겠지만 필자가 본부 국제국장 재직 시에도 두 차례나 더 슈로터 처장을 만났으나, 이러한 요청을 모두 거절한 바 있었다.
미국, 지속적으로 자국산 쌀 구매문제를 제기하다
필자가 제네바 농무관에서 본부 국제농업국장으로 보임(95.1.6) 받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주한 미국 대사관의 농무공사(John Child)가 찾아와 두 가지 문제를 제기하였다.
UR 막바지 한・미 농업장관 회담 시 미국산 쌀 구매를 고려하겠다고 한 허 장관의 약속(대화록 Memo가 있음을 상기)에 따라, 첫째, 한국이 ‘95년 중 구매할 최소시장 접근물량(MMA, 5만톤) 중 일부를 미국산으로 하여 줄 것과 둘째, ’95년 3월 중 미국 쌀의 전시회를 서울에서 열겠다는 것이었다.
필자는 먼저 UR 협의 시 어디에도 미국산 쌀 구매문제에 대한 합의가 없었고, 특히 미측이 일방적으로 작성했다고 주장하는 대화록은 신뢰성이 없다고 일축하였다. 그러나 전시회는 문제가 없다고 허락하여 주었다.
그리고 95년 10월 8일에는 도쿄에서 APEC 회의에 참석중인 필자를 갑자기 찾아온 미국 농무부 해외농업처(FAS) 슈로터 처장과의 만남이 있었다.
그는 ‘96년 2월 9일에도 사전 통보도 없이 서울에 와서 필자를 만나자는 연락을 하여 온바 있다.
필자는 그와 만나는 장소를 고민하다가 사무실이 아닌 과천청사 앞에 위치한 그레이스호텔에서 오찬을 함께 하기로 정하였다. 만약 사무실에서 만날 경우, 만남이 공식화될 뿐 아니라 그 면담 결과를 기록으로 남겨야 하며, 관련부처에도 통보함은 물론 요청이 있을 경우 국회에도 대화록을 제출해야 하는 등 당시 쌀 문제는 우리에게는 매우 민감한 사안 이였다.
그날 점심 자리에서 그는 95년도 한국의 쌀 MMA 구매에 미국산 쌀이 포함되지 않은 점(우리는 5만1,307톤 전량 인도산으로 구매했다)에 유감을 표시하며, ‘96년도 구매 시에는 자국산 쌀의 구매를 고려해 달라고 말했다. 사전 약속 없이 급히 찾아온 그의 다급한 입장이 어느 정도 이해는 갔으나, 대외적으로 공개입찰을 통하여 구매할 수밖에 없는 우리의 사정을 설명하며 시간이 지나면 외국산 쌀의 인식이 바뀔 것이라 답했다. 아울러 고품질의 미국산 쌀의 구매 필요가 생기게 되면 특별히 고려해 볼 수 있겠다고 그를 설득하였다. 그리고 다음 달 3월 28일 제네바에서 개최되는 WTO 농업위원회 참석 시 오찬을 함께하기로 약속하고 헤어졌다. 역시 그는 아무 소득 없이 그냥 돌아간 셈이 되었다.
필자는 그와의 면담 내용을 우리 부의 상부에만 구두 보고하고 타 부처에는 일체 알리지 않았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은 3월초 경제장관회의에서 외무부가 주미한국대사관에서 미국 농무부의 강력한 요청이 있었다고 하면서 ‘96년도 MMA 쌀 수입시 농림부가 미국산 쌀 구매문제를 고려해 달라고 발언했다. 이에 최인기 농림부장관은 2주 후 제네바에서 미국 농무부 해외농업처장과 농림부 국제농업국장이 만나기로 되어 있으니, 그 만남을 통해 미국의 요청이 어느 정도인지를 보아가며 결정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여 일단 뒤로 미루었다.
3월 28일 슈로터 처장이 쌀 문제를 먼저 제기 않도록 요청하다
3월 28일의 WTO 농업위원회(96.3.28. 11:00) 참석차 제네바에 간 필자는 회의가 열리기 한 시간 전, 제네바 근무 시 친하게 지내던 미국 대표부의 농업담당 Thorn 참사관을 만났다. 그에게 필자는 우리가 UR 이후 이행한 ‘95년 실적 중에 미국산 농산물의 수입 실적(MMA, CMA물량)이 크게 늘어난 점과 필자가 서울을 떠나기 직전 부산항에 묶여있었던 미국산 닭고기의 위생문제를 조기에 해결하고 온점 등을 알려주고, 금일 오찬 시 슈로터 처장이 미국산 쌀 수입문제를 필자보다 먼저 거론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부탁하였다.
그리고 그날 오찬(3.28 13:00∼15:00, Jade Garden)에는 우리 측 참석자들이 미국 측(2인)보다 훨씬 많았다. 회의 참석차 온 외무부 직원은 물론, 제네바대표부의 경제팀 전원이 참석하여 슈로터 처장과 필자의 대화에 귀를 세웠다. 식사 중에 그는 쌀 문제를 화제로 먼저 꺼내지 않았다. 오히려 필자가 ‘95년도 MMA 쌀 수입물량전량(5만1,000톤)을 인도에서 공개입찰에 의해 저가로 구매하였다고 하는 얘기와 함께, 식탁용이 아닌 가공용으로 사용할 것임을 설명하고 앞으로 양질의 쌀 구매가 필요할 경우 미국산도 고려해 볼 수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 이에 그는 그렇게 될 수 있으면 좋겠다고 하였으며, 화기애애한 분위기 가운데 식사를 마쳤다. 다소 필자의 사전 의도가 있었지만 강력한 미국산 쌀의 구매 요청이 있을 것이라는 외무부 측 예상이 빗나간 셈이 되었다. 나중에 들은 얘기로는 외무부 본부로부터 필자가 움직일 때는 반드시 동행하고 그 내용을 별도 보고토록 지시가 있었다고 한다. 그날 이후 외무부는 더 이상 이 문제를 경제장관회의 등에서 거론하지 않았다.
미국 측 더 이상 미국산 쌀 구매 문제 제기 않다
그리고 이 문제가 다시 한 번 불거진 것은 6개월 후인 그 해 9월초 미국 농무부에서 다시 주미한국대사관을 통하여 제기한 것으로, UR 끝나기 직전에 가진 ‘93년 12월 13.일 한・미 양국 농업장관간의 대화내용이었다. 이에 외무부는 농림부에는 통보하지 않고, 직접 본부 C 심의관을 허신행 전 장관(당시 한국소비자보호원장)과 면담(96.9.6)하여 UR 협상 당시의 언급 내용을 확인하고 그 내용이 그다지 심각하게 책임질 발언이 아니었음을 미국 측에 통보한 모양이다. 그 이후로 미국 측은 필자가 국장으로 재직한 2001년 5월까지 한 번도 이 문제를 다시 제기하지 않았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은 그해 말, 슈로터 처장이 그 자리를 그만 두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필자는 그의 퇴직이 우리의 미국산 쌀 구매 거절 때문이 아니기를 바랐다. ‘94년 11월 3일 제네바에서 이 문제로 처음 만난 이후에도 필자와 여러 차례 만났으나 그의 구매 요청을 들어 주지 못해 개인적으로 미안한 마음이 들었으나 어쩔 수 없었다. 특히 미국에서 차관보급인 그는 국장인 필자와의 만남으로 만족하고 더 이상의 상위 계급 간부와의 면담을 요구하지 않았다. 항상 국장 선에서 그 문제를 처리함으로써 국내적으로 더 이상의 정치 문제화 되지 않은 것이 농림부로서는 다행한 일이었다.
필자의 미국산 쌀 구매 반대는 2004년 재협상 때문
이제는 필자가 미국산 쌀 구매를 오랫동안 일관되게 반대해온 이유를 밝히고자 한다. 사실 당시 주위에는 미국산 쌀을 구매해 주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었다. 이를 간접적으로 전달해 오기도 하였으나 필자는 단호하게 거절한 바 있다. 그렇게 반대해온 가장 큰 이유는 UR농산물협정문에 규정된 2004년도 쌀관세화유예 재협상 때문이었다.
특히 재협상 조건이 협정서 상에 별도로 없는 일본과 달리 우리는 UR농산물협정부속서 5의 B에 명시된 10년 후 재협상을 하는 조건이 들어 있었다. 필자는 2004년이 되면 우리는 일본처럼 중도에 관세화를 하지 않고 재협상을 택할 것이 불가피할 것으로 보아, 그 재협상에서 써야할 수단(Card)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이었다.
솔직히 말하여 필자는 ‘93년 12월 13일 한・미 두 농업장관 간에 오고간 대화내용을 모른다. 다행히도 그 자리에 동석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를 일관되게 부정하는 데 아무 문제가 없었다. 또한 미국 측이 주장한 그날의 대화록을 보려고도 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이를 인정하지도 않았다. 한편으로는 필자가 두 차례에 걸쳐 국제농업국장을 6년 넘게 지낸 덕분에 미국산 쌀 구매 문제에 대한 농림부의 일관된 입장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라 생각한다.
만약 우리가 이를 인정하고 일본처럼 50% 정도의 미국산 쌀을 구매해 주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렇게 해줄 경우 최소한 2004년부터 50%+α를 해주어야 될 것이며 거기에 연도별로 증량해 주게 되면, 다른 쌀 생산국인 중국, 태국, 호주, 베트남 등과는 어떤 카드로 협상할 것인가? 아마도 무척 어렵고 장기간을 요하는 협상이 되었음이 틀림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