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92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의 작품상, 감독상 수상에 이어 올해 93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도 윤여정 배우가 여우조연상을 수상했다. 이미 시상식에서 그녀가 남긴 수상 소감은 전 세계 수많은 사람들에게 진한 감동과 숱한 화제를 뿌리고 있다. 올해 74세, 관록의 대배우가 포기하지 않고 오른 자리이기에 더욱 아름답고 빛나게 보인다.
지난 아카데미 수상 자료를 살펴 봐도 지금까지 아시아권 영화가 연달아 2회 연속 아카데미 수상을 한 기록은 없는 것 같다. 특히 배우의 수상은 작품상이나 감독상과는 사뭇 다른 느낌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다.
'아시아계 배우에게는 단 두 번만 문을 열었던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작년 이맘 때 아카데미 시상식이 있기 전, 봉준호 감독은 '아카데미는 그저 로컬(지역) 영화축제'라면서 당시 자신이 안고 있던 아카데미 수상에 대한 부담에서 벗어나려고 했다. 요즘 들어서야 그가 그런 말을 왜 했는지 실감이 간다.
실제로 아카데미 수상자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로컬 영화 축제라는 그의 표현이 틀린 말이 아니란 생각이 든다. 영국과 미국을 중심으로 한 영어권 영화들을 중심으로 하고 있는 캘리포니아 영화축제가 세계적인 영화제가 된 것은 역시 미국 영화의 파워 덕분이다.
때문에 영어권 영화제인 아카데미의 경우 배우들이 사용하는 언어는 매우 중요한 평가의 기준이 된다. 영어를 사용하지 않은 비영어권 배우들의 경우에는 핸디캡이 클 수밖에 없다. 이런 이유로 역대 아카데미 수상자 중에서 아시아권 여배우가 탄 사례는 단지 두 번 있을 뿐이다. 1957년 〈사요나라〉에 출연했던 일본 배우 우메키 미요시가 첫 번째 수상자였고, 두 번째가 바로 이번 93회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수상한 배우 윤여정이 해당된다.
우메키 미요시나 윤여정의 경우 미국 자본과 미국인 감독이 연출한 작품들이란 공통점을 지니는 부분도 흥미롭다. 엄격한 잣대로 따진다면 비영어권에서 제작되고 백인이 출연하지 않은 영화 중에서 수상자가 나온 경우는 아직까지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만큼 쉽지 않은 관문인 셈이다. 심지어 골든글러브 시상식의 경우에도 〈미나리〉는 외국어부문 수상작으로 분류되었다. 골든글러브는 아직도 영화 속 대사의 반 이상이 영어가 아닐 경우에는 외국영화로 분류되는 규정을 적용한다.
작품이나 감독의 연출력을 바탕으로 한 평가와 달리 비영어권 배우가 수상하기란 하늘의 별 따기. 아무래도 영어 이외의 언어에 익숙하지 않은 아카데미 심사위원들의 눈높이를 맞추기에 아직은 쉽지 않은 부분이 있는 것 같다.
비영어권 배우의 수상만큼이나 아카데미의 높은 문턱을 실감해야 했던 이들이 있었으니, 그들은 바로 아프리카계 미국인이들이었다. 언어만큼이나 피부색 역시 아카데미 시상식에서는 쉽게 넘볼 수 없는 높은 장벽들이다. 아카데미의 보수성을 지적하는 평론가들의 목소리가 높아지는 부분이기도 하다. 언어와 피부색, 사실 헐리우드 영화가 전 세계 시장에서 언어와 피부색을 나누면서 세일즈를 한다면 망해도 벌써 망했을 것이다. 적어도 세일즈를 할 때 그들은 피부나 언어 따위는 가리지는 않는다. 돈을 벌 때는 언어와 피부색을 가리지 않는 헐리우드 영화들이 한 해의 좋은 영화들을 시상하는 자리에서 언어와 피부색으로 차별을 하고 있다는 현실은 좀 씁쓸하기만 하다.
어쨌든.
그런 의미에서 2002년 74회 아카데미 시상식은 주목할 부분이 있다. 바로 그해 우리에게는 〈엑스맨〉 등으로 유명한 할 베리가 흑인 여자배우로서는 최초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드디어 보수적인 아카데미가 금기시 되어 왔던 흑인들에게도 문을 열었다고 흥분했다. 놀란 것은 수상자였던 할 베리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시상식 장에서 너무 놀라고 흥분한 나머지 '오마이갓'을 계속 연발하며 울먹였다. 무려 74년 동안 문을 두드렸던 흑인 배우들 입장에서는 정말 감격스러운 순간이었을 것이다. 잠시 동안 흥분했던 감정과 눈물을 멈추며 할 베리는 마이크 앞으로 한 걸음을 다가섰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이 순간은 제게 너무 벅찹니다. 지금 이 순간은 레나 혼, 다이앤 캐롤을 위한 순간입니다. 그리고 제 옆에서 함께 해준 제이다 핀켓, 안젤라 바셋, 비비카 폭스를 위한 순간이기도 합니다. 모든 이름 없고 얼굴 없는 유색인 여성들을 위한 순간이기도 합니다."
시상식 장에 있던 관객들은 갑작스럽게 할 베리의 입에서 튀어나온 '레나 혼', '다이앤 캐롤'이란 이름에 의아한 표정들을 지었다. 카메라는 곧바로 함께 여우주연상 후보에 올랐던 금발의 르네 젤위거가 입에 손을 가져가는 장면으로 전환됐다. 도도한 아름다움을 뽐내던 니콜 키드먼의 눈가가 촉촉히 젖어드는 장면도 포착됐다. '도대체 그들은 누구였을까?'
1940년대 미국 재즈싱어와 뮤지컬 배우로 활동했던 레나 혼은 흑인 최초로 백인 재즈 밴드에서 함께 협업하면서 브로드웨이와 헐리우드 무대를 누볐던 인물이었다. 인종차별이 극심했던 당시로서는 흑인 가수가 백인 밴드와 함께 무대에 선다는 것 자체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오직 실력 하나로 자신의 존재를 입증해야 했던 것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그녀의 재능이나 능력은 단지 피부색 하나 때문에 제대로 평가 받을 수 없었다.
할 베리가 호명했던 두 번째 인물 다이앤 캐롤 역시 1960년대 〈포기와 베스〉를 시작으로 〈Mo' Better Blues〉까지 수많은 작품에서 스타로 인정받았던 배우였다. 그녀 역시 아카데미와는 인연이 없었는데, 그래도 가장 근접했던 순간은 1962년 토니상을 탔던 순간과 1968년 골든글로브를 수상했던 때였다. 대중의 인기와는 무관하게 아쉽게도 그녀는 1974년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후보에 오른 것으로 만족해야만 했다. 이런 사례들을 보면 흑인, 특히 흑인 여성에 대한 아카데미의 문턱이 얼마나 높았는지를 실감케 한다. (흑인 남자 배우의 경우에는 1963년 시드니 포에티에가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수상)
'오늘의 축복은 과거 누군가 흘린 땀의 보상이다'
〈기생충〉의 봉준호 감독이나 〈미나리〉의 윤여정 배우나 오늘 그들이 누리는 영광과 축복은 과거 한국영화를 위해 묵묵히 땀흘려왔던 누군가의 노력이 얻은 결실일 것이다. K-Pop을 비롯해서 한국 드라마, 한국 영화가 전 세계에서 인정을 받고 있는 지금, 그만큼 한국 문화 시장이 커졌다는 반증이기도 할 것이다. 최근 수년 동안 한국영화가 얻은 명예와 영광 뒤에는 그만큼 성숙해지고 훌쩍 커진 '대한민국'이라는 존재가 뒷받침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그걸 가능케 했던 과거의 수많은 영화인들의 땀과 눈물이 바탕에 깔려 있는 것은 아닐까.
아카데미 시상식 장에서 윤여정이 마지막 감사의 인사를 자신의 첫 영화 데뷰작이기도 했던 〈화녀〉(1971년)의 김기영 감독에게 돌린 것은 그런 점에서 봤을 때 매우 의미심장한 발언이었다. 자신의 뿌리와 과거를 마주하는 것, 비록 지난 시간이 초라하거나 보잘 것 없더라도 자신의 현재를 있게 만든 과거를 사랑할 수 있는 자들에게 미래의 영광 역시 계속될 것이다. 그것이 지난 며칠 동안 배우 윤여정과 할 발리를 통해 다시 한번 확인한 삶의 소중한 가치들이 아닐까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