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일성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에 대한 판매가처분 신청이 기각됐다는 소식을 듣고 머릿속에 처음 떠올랐던 책이 한 권 있었다. 바로 '나의 케임브리지 동지들'이란 책이다.
2013년 출간된 이 책의 저자 유리 모딘(Yuri Modin)은 실제로 소련 KGB 공작원이었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소비에트와 공산주의를 위해 소련 스파이로 활동했던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 출신의 다섯 명과 접선하고 현지 관리와 지원을 담당했던 인물이었다.
그래서 원래 제목도 '케임브리지 파이브'(Cambridge five)다. 킴 필비(Kim Philby), 가이 버제스(Guy Burgess), 앤서니 블런트(Anthony Blunt), 도널드 매클린(Donald Maclean), 존 케른크로스(John Cairncross) 이들 다섯 명의 행적이 세상에 공개된 것은 1980년대다. 실제로 그들이 활약했던 시대는 1950년대. 다섯 명 스파이들이 사망한 이후에야 저자를 통해 세상에 전모가 밝혀진 셈이다.
그렇다면 이 케임브리지 5인방을 통해서 세계 역사는 얼마나 바뀌었을까? 일단 책이 소개하고 있는 굵직한 사건만 나열해 보자.
▲ 미국 원자폭탄 개발 정보 누출, 소련의 원자폭탄 개발, 덕분에 소련은 미국에 대응할 수 있는 군사대국으로 성장
▲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신설 과정에 대한 정보 누출, 소련의 신속하고 효과적인 대응
▲ 소련의 김일성 남침 계획 승인에 직간접적 영향
소련이 가장 주목했던 인물, 킴 필비는 영국 정보국 내에서 소련 첩보 활동과 공산당 활동의 감시를 담당했던 MI6 중 가장 중요한 부서인 9과의 과장까지 승진했다. 소련과 첩보 전쟁을 벌이던 냉전 시대, 영국 정보국 핵심 부서에 소련의 스파이가 임명되는 웃지 못할 일이 벌어진 것이다.
미국의 핵개발 프로젝트였던 '맨해튼 프로젝트'(Manhattan Project)와 영국의 '튜브 앨로이스 프로젝트'(Tube Alloys Project) 사이에서 양국의 조율사 역할을 담당했던 인물은 케임브리지 5인방 중 가장 공직에 높이 올라갔던 도널드 맥클린이었다. 미국과 영국은 원자폭탄 제조 문제를 극비리에 추진하면서 양국 관계의 조율을 소련 스파이에게 맡긴 셈이다.
게다가 뉴멕시코 앨라모고도 인근에서 실시된 첫 번째 원자폭발 실험 현장에는 영국 과학자문위원회 위원장 비서 자격으로 존 케른크로스 역시 동석을 하게 된다. 말 그대로 원자폭탄 설계도에서부터 첫 번째 원폭 실험까지 소련은 모든 정보를 고스란이 장악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케른크로스가 영국 방위 산업과 군비 예산의 핵심 정보에 접근할 수 있는 권한을 얻는 순간, 이제 우리 소련은 영국이 탱크와 비행기 제작에 얼마나 돈을 쏟아붓는지, 얼마나 많은 돈을 핵 연구에 배정하는지 속속들이 알게 되었다. 이런 모든 것이 소련 군대에는 횡재였다." (저자 유리 모딘)
흥미로운 것은 이들 케임브리지 5인방이 '자발적인 공산주의'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오늘로 치면 금수저 입에 물고 태어나 부러울 것 하나 없는 영국 최고의 명문대학을 나와 국가 권력의 핵심 부서에서 활동했던 그들이 외부적 요인이 아니라 자생적 소련의 스파이가 되었다는 뜻이다. 그들은 죽을 때까지 자신들 이념의 고향을 영국이 아니라 소비에트라고 믿었다.
무려 30년 동안 영국 사회 핵심층에서 암약했던 이들의 적대적 행위와 사건의 전모가 드러나면서 영국 사회는 요동쳤다. 정보가 누출되었다는 사실보다 영국인들을 경악케 한 것은 '어떻게 그들이 자생적 소련의 스파이가 되었는가?'라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사회적으로 숱한 질문들이 던져졌다. 정신분석학자부터 사회학, 정치학을 망라하는 다양한 전문가들의 연구가 줄을 이었다.
그들이 내린 결론은 바로 하나. 바로 '사상'의 문제는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뒤집어 놓고 말한다면, 이익과 목적을 위해 자신의 사상을 감출 수도 있다는 뜻이다. 잘못된 사상에 대한 검증이나 논란 역시 쉽지 않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더욱 흥미를 끄는 것은 그들이 마음에 품었던 이념의 고향, 즉 공산주의라는 사상이 만들어진 것은 공교롭게도 그들이 젊은 시절 공부했던 케임브리지 대학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당시 케임브리지 대학 내에서는 알게 모르게 적지 않은 공산주의 이념 서클들이 존재했고, 이 다섯 명의 공통점은 바로 이념의 서클과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이었다. 당연히 이들의 사상에 결정적 영향을 끼친 것들은 바로 그들의 도서 목록에 올라 있던 책이었다. 책을 통해 얻은 변화는 느리고 서서히 일어나지만, 한번 굳어진 마음과 영혼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는 사실을 영국인들은 깨닫게 된다.

아무튼. 다시 우리의 현실로 눈을 돌려보자. 김일성의 회고록 논란을 보면서 혹자는 '촌스럽게 왜 난리를 떠냐고 한다'. 그런 여론을 만들고 있는 인물 중에는 보수정당의 국회의원도 있다. 거듭 언급하지만 이 문제는 책 한 권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다. 바로 법에 관한 문제가 될 수밖에 없다. 보수를 표방하는 현직 국회의원 신분에서 쉽게 할 소리는 아니란 뜻이다.
국회의원 하태경의 주장은 간단하다. '이제 남북 격차가 심해서 세기와 더불어 같은 책 한 권 정도는 충분히 국민들 스스로 극복할 수 있다'는 논리다. 그렇게 기고만장할 만큼 남북 대립이 완화되어 있고, 한반도가 안전한지 일단 궁금하다. 자신의 주장을 펼치기 전에 하태경은 한반도 정세가 얼마나 변했고, 또 얼마나 안전한지를 먼저 설득력 있게 제시해야 한다.
어쩌면 그런 기고만장한 여유 덕분에 '케임브리지 5인방' 같은 자생적 공산주의자들이 영국 사회에서 탄생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두 번째로 지적하고 싶은 것은 법과 원칙, 상식과 논리가 무너지는 사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하는 문제다. 책 한 권으로 끝날 수 있는 문제가 아님은 이 문제에 우려 섞인 목소리를 많은 사람들의 일관된 주장이다.
심지어 친북좌파 정부 하에서 더 이상 논란을 일으켜서 국가보안법 개폐까지 논의가 확장되는 것을 막야야 한다는 웃지 못할 이야기도 들려온다. 이미 2018년부터 국가보안법 폐지를 골자로 하는 현 정부의 헌법 개정 논의는 시작된지 오래다. 다음 정권까지 지금과 같은 친북좌파 정권이 권력을 잡는다면 아마 국가보안법 폐지는 그 첫 번째 수순이 될 것이다.
세 번째, 히틀러의 '나의 투쟁'도 합법적으로 출판이 되는데 김일성이라고 해서 뭐가 다른 것인가,라며 논란을 원천에서 잠식시키려는 흐름도 있다. 웃기는 소리다. 이래서 좌파 지식인들 머릿속엔 뒤틀린 사실 관계만 존재한다고 비판을 받는 것이다.
2012년 독일에서 히틀러의 '나의 투쟁'이 처음 공식 출판됐다. 당시 책의 출간을 맡았던 영국 출판 담당자는 'AFP통신'과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밝혔다.
"책 출간과 동시에 12~15쪽 분량의 소책자가 나올 것이다. 이 책은 '나의 투쟁'의 논란이 될 수 있는 원문 내용과 이에 대한 역사가의 서평이 포함된 책이 될 것이다."
우리보다 앞선 출판 문화, 수십 배 차이는 독서열풍을 자랑하는 독일과 영국인들이 고작 히틀러의 '나의 투쟁' 책 한 권 두려워서 해설서를 곁들여서 출판해야 했을까? 겨우 고작 책 한 권일 뿐인데... 히틀러의 전기를 발간한 독일의 사례처럼 김일성의 회고록 역시 전문가들의 해설서나 주석이 풍부하게 포함된 방식으로 사회적 충격을 완화시키는 것이 합리적이고 현실적인 방식이 아닐까 생각한다. 게다가 현 정부 들어 발행되고 있는 요즘 초등학교 아이들 교과서를 본 적 있는 사람이라면 그렇게 쉽게 말할 수 있는 부분은 아닐 것이다.
덧붙여서 이미 종식을 고한 나치즘과 현존하는 위협 세력인 북한의 김일성주의를 동일한 잣대로 평가할 수 있는지 여부에 대한 비판은 이제 그들 귀에는 그저 공허한 데코레이션처럼 들리는 것 같다.
사상과 안보는 최대한 안전하고 보수적인 입장을 취하는 것이 국가를 운영하는 사람들에게는 최고의 덕목이 되어야 한다. 이미 노무현 대통령의 사례를 봐도 잘 알 수 있는 일이다. 숱한 진보 지지자들의 반대를 무릎쓰고 안보 정책들을 관철시킨 이유가 그것이다.
사상과 안보의 헛점에서 파생된 문제점들은 쉽게 극복이 안 될 뿐만 아니라 회복의 속도 역시 더딜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적의 미사일에 파괴된 건물을 다시 회복시키는 것보다 더 힘들고 어려운 것이 적이 쏜 사상전의 화살촉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았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