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허구의 세계와 실제 현실의 세계를 넘나드는 혼성 장르들이 많아지고 있다. 최근 세계 영화에서 뚜렷하게 증가하고 있는 트렌드 중 하나다. 상상력으로 만들어낸 세계보다 훨씬 리얼한 현실 세계 곳곳의 일들이 더 흥미롭고 때로는 감동과 자극을 주는 것이리라.
사실 실화를 바탕으로 각색된 영화들이 각광을 받거나 흥행에 성공하는 일은 이미 오래된 일이다. 미국 할리우드 제작자들 사이에는 일종의 자신들만의 성공 방정식이 있는데, 여기에서도 '실화적 요소'가 차지하는 비중은 작지 않다. 지난해 미국에 영화 '김일성의 아이들'을 배급하면서 알게 됐던 한 미국 프로듀서는 할리우드가 선호하는 성공의 요소들 4가지를 다음과 같이 알려주었다.
1) 감옥이나 수용소, 병원 등이 나오는 영화
2) 역사적 탐험이나 사건이 포함된 영화
3) 남녀 간의 러브 스토리를 소재로 한 영화
4) 자유와 인권을 소재로 다룬 영화
결국 실제 일어난 사건을 소재로 한 영화들을 뜻한다. 물론 개인적인 취향이 사람마다 다르고 성공이라는 기준도 다를 수 있기 때문에 일반화시킬 수는 없는 단지 그의 생각일 뿐일 수도 있다. 하지만 가만히 보면 틀린 말도 아니다. 그만큼 현실의 세계는 가공의 세계가 흉내 낼 수 없는 흡입력 있는 스토리텔링을 포함하고 있다. 작가에 의해 만들어진 세계가 넘볼 수 없는 가공할 파괴력이 있다. 갈등과 역경을 이겨내고 자신과의 싸움에 승리하는 인간들의 진실한 모습들은 쉽게 모방할 수도 없다. 오직 그 역경을 극복한 자만이 만끽할 수 있는 짜릿함이다.
'어떻게 다큐멘터리적 요소들을 글쓰기에 반영할 것인가?'
다큐멘터리 영화를 제작하는 사람들에게는 일종의 사명감 같은 것이 존재한다. 비록 극영화나 로맨틱한 연애물에 비해서 흥행도 잘 안 되고 상업적인 이익도 기대할 수 없지만, 다큐멘터리의 진실된 세계를 탐구하고 감춰진 진실을 세상에 들춰내는 것만이 지니는 고유한 매력 같은 것이 있기 때문이다. 더 좋은 작품들을 세상에 나올 수 있도록 일종의 일차적 재료를 만들어낸다는 뿌듯함이다. 세상에 감춰진 사건, 뭔가 배울 게 있는 인간들의 삶, 가슴 찡한 사랑 이야기 등이 그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어찌 보면 인간의 상상이 허락하지 않는 저 언덕 어딘가에 존재하는 진실의 세계를 향해서 과감하게 여행을 떠나는 탐험가이다. 에베레스트를 기어이 올라가려고 하는 이유는 그곳에 산이 있기 때문이라는 어느 누군가의 말처럼, 오로지 사실의 영역, 진실의 목소리를 향해 무조건 달려간다. 그런 열정이 있기 때문에 다큐멘터리가 지금까지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런 매력이 없다면 솔직히 돈도 안 되고 힘만 드는 일을 굳이 찾아내서 하려고 할 이유도 없을 것이다.
어떻게 보면 '아버지 같은 장르'다. 자식이 잘 되는 것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는 우리네 아버지들처럼 묵묵히 제 갈 길을 간다. 아무리 멋진 사실을 발굴한다고 해도 그를 기다리는 것은 화려한 조명이 아니다. 그저 몇몇 사람들의 환호와 박수 소리밖에 기다리는 것도 없다. 물 한 모금 마시고 다시 신발끈을 조여 매고는 또 어딘가 있을 미지의 세계를 향해서 여행을 떠난다. 그런 운명이지만 그래도 자신의 운명을 탓하는 다큐멘터리 작가들은 없을 것이다. 적어도 내가 보기엔 그렇다.
로버트 플래허티가 1922년 만든 '북극의 나누크'에서부터 마이클 무어의 '화씨 911'이나 내가 개인적으로 제일 좋아하는 건축가 루이 칸의 일생을 다룬 'My Architec'까지 여전히 보고 배울 것들이 많다. 영화가 순수한 교육적 기능까지 담당하는 것 또한 다큐멘터리 작가들이 놓칠 수 없는 매력이다. 솔직히 보고 나서 '내가 지금 뭘 봤지?'하고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드는 영화들이 얼마나 많은가. 시간 낭비, 돈 낭비는 말할 것도 없다. 그런 점에서 영화를 통해 세상 뭐 하나라도 배울 게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북극의 나누크'를 로버트 플래허티가 조작했느니 돈을 위해 만들었느니, 여러 주장들이 존재하지만 개인적으로 어쨌든 그 추운 북극에서 자연과 맞서 생존하는 인간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는 사실만으로도 머리가 숙여진다. 인간의 역사에서 그렇게 자신의 가족을 위해서 자신을 희생하면서 살아왔던 아버지들이 어디 한둘이겠는가. 하늘의 별처럼 북극에는 나누크가 존재하는 것일 수 있다.
참고로 나누크(Nanook)는 '곰의 대가'(The master of Bears)를 의미한다. 나누크는 북극 이누이트족들이 곰사냥을 할 때 어떻게 사냥을 하고 어떤 곰을 선택할지, 만약 곰 사냥의 과정에서 명령을 따르지 않은 사냥꾼을 징벌하는 권한과 권위를 가진 존재였다. 다큐멘터리가 화면 속에 다 담아내지 못했지만 자식을 위해 곰과 싸우며 자신을 희생해야 했던 아버지 사냥꾼들도 수없이 많았으리라. 작품의 감동은 인간의 모든 것, 사건의 전모를 나열한다고 해서 찾아오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건 오직 작품의 정수를 통해서만 느낄 수 있는 것이 아닐까.
'다큐멘터리와 극영화의 경계에서 선 작품들'
얼마 전 보았던 '미스터 존스' 역시 실제로 존재했던 역사적 사건과 허구의 경계에 선 작품으로 무척 재밌게 보았다. 개인적으로는 최근 세계 패권을 장악하기 위해 일대일로를 비롯해서 작지 않은 문제를 일으키고 있는 중국 공산당에 대한 역사, 특히 그들이 주장하는 인민 민주주의 독재를 공부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스탈린 체제로 눈을 돌리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영화는 가레스 존스라는 한 기자의 시선을 빌려 1930년대 소련에서 벌어졌던 대기근 사태에 주목하고 있다. 다큐멘터리를 통해 세상을 좀 더 나은 세상으로 바꿀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에게는 단비 같은 영화다. 형식은 극영화의 픽션화 된 구조를 채택하고 있지만, 보는 내내 거의 다큐멘터리를 보는 듯한 기분이 들게 만든다.
영화는 1930년대 스탈린 체제가 막 시작됐던 소련 체제 하의 우크라이나에서 일어났던 대기근과 그로 인해 300만 명이 추위와 배고픔 속에서 목숨을 잃었던 비참한 사건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비극적인 일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 감독은 이 영화를 통해서 인민을 위한 평등 사회를 만들겠다는 공산주의 종주국 소련에서 인민보다 자신들의 이익에 충실했던 국가 권력과 배부른 특권 관료 집단 '노멘클라투라'의 등장을 냉소적으로 꼬집는다.
300만 명이 먹을 것이 없어서 굶어 죽고 겨울을 날 수 있는 땔감이 없어서 추위에 얼어 죽는 상황 속에서도 우크라이나 곳곳에서 자신들이 생산한 곡식들을 모스크바 행 기차에 실어 나르는 비참한 민중들의 모습에 포커스를 맞춘다. 그리고 이 사실을 영국 출신의 가레스 존스 기자가 파헤친다. 그의 카메라에 찍힌 우크라이나 대기근 사태 사진들이 외부로 알려지면서 공산주의의 민낯이 폭로된다.

1956년 스탈린 사후 권력을 장악했던 흐루쇼프가 '인간의 모습을 한 사회주의로 돌아가자'며 스탈린에 대한 전면적 비판에 나설 수 있었던 근거 중 하나이기도 했다. 비밀경찰, 대숙청, 관료 집단, 부패한 국가 권력, 그리고 이들의 만행을 보고도 진실을 감추는 언론의 이중성, 그들의 가면 아래 감춰진 민낯이 적나라하게 노출된다. 그렇게 권력은 국민을 속였다.
스탈린이 역사에서 단죄를 받는 이유는 그렇게 수백 만 명이 목숨을 잃는 상황 속에서도 자신들의 배만 불리고, 헐벗은 민중들에게 총부리를 겨눴다는 사실에 있다. 영화 속에도 배고픈 군중들이 역설적이게도 자신들이 생산해낸 곡식을 모스크바행 수송 열차에 싣는 장면이 등장한다. 그 어떤 것보다 놀랍고 비참한 충격적인 고발이다.
구소련의 붕괴를 이야기할 때 자주 등장하는 개념이 두 가지가 있다. '페레스트로이카'(개혁)와 '글라스노스트'(개방)이 바로 그 개념들이다.
여기서 페레스트로이카는 스탈린으로부터 이어져왔던 구소련의 폐쇄적이고 억압적인 정치체제와 효율성을 잃어버린 경제 시스템을 벗어던지고 자유로운 경쟁과 개방성에 기초한 전환을 의미한다. 그리고 '글라스노스트' 개방이란 서구 사회로 문을 열고 자본주의 시장 경제, 의회민주주의적인 요소들의 도입을 의미하는 것으로 알려져 왔다.
하지만 실제로 소련의 붕괴를 촉진시킨 것은 소련 내부의 정보 공개, 즉 내부적 글라스노스트였다. 구소련 체제가 갖고 있었던 모순되고 비효율적이며 비인간적인 시스템들을 소련 국민들 스스로 자각하는 과정에서 '글라스노스트', 즉 개방이 큰 역할을 했다는 뜻이다.
정치 시스템의 변화는 외부의 충격보다 내부에서 폭발하는 힘에 의해서 더 크게 좌우된다. 스탈린의 비인간적인 숙청과 살육의 역사, 소련 공산당의 권위주의적이며 비효율적인 정책들을 담은 역사적 정보가 국민들에게 공개되면서 소련 국민들은 자신들이 잘못된 체제 속에서 살고 있었다는 자각이 일어났고 그것은 군부의 쿠데타까지도 잠재울 수 있는 힘이 되었다.
냉전 체제의 극복, 소련 권력 집단 상층부의 요구는 페레스트로이카를 통해서 소비에트 사회가 안고 있는 고질적인 구조적 모순과 한계를 극복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런 모순의 극복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개혁을 이끌어나가는 강력한 중앙 권력이 필요했다. 사회는 언제는 길항적인 대립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변화하려는 자와 변화를 거부하는 자들이 대립한다. 페레스트로이카의 성패 역시 같았다. 구소련 체제를 유지하려는 세력과 이를 극복하고 변화를 통해 민중의 삶을 변화시키려는 세력들이 대립했다.
결국 페레스트로이카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보다 강력한 대중적 지지가 필요했다. 그것은 과거의 잘못된 공산주의 정책에 대한 비판으로부터 출발했다. 일종의 과거와 단절이다.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알지 못하고선 과거를 비판할 수도 없는 법. 여기서 페레스트로이카의 성공을 위해서 '글라스노스트', 즉 자유로운 정보에 대한 접근, 바로 정보 공개 정책이 요구됐다. 자신들의 부패를 숨기고 어떻게든 살아남으려는 권력집단의 위선을 극복하고 소비에트의 경직성을 극복하기 위해 그동안 감춰진 진실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것이 소련 몰락의 시작이었다.
정보 공개는 이렇듯 놀라운 힘을 발휘한다. 국민의 자각, 그 자각을 이끌어내는 진실의 힘보다 더 강력한 사회 변화의 모티브는 없다는 것을 구소련의 페레스트로이카와 글라스노스트는 잘 보여주고 있다.
그런 점에서 봤을 때 북한의 폐쇄적인 정치 체제의 붕괴 역시 국민들 스스로의 자각, 내부적 힘의 폭발, 결국 정보 공개로부터 시작될 가능성이 높다. 북한의 실상을 알리는 정보들이 계속 나와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 결국 북한 내부의 구성원들 사이에서 모순된 정치 체제의 실상을 북한 주민들 스스로 자각할 수 있도록 유도하기 때문이다. 북한 역시 그 근본적 변화는 외부적 충격이 아니라 내부적 모순의 자각에 의해서 변화할 가능성이 높다. 그런 점에서 북한판 글라스노스트는 의미가 있을 것이다. 거꾸로 생각하면 김정은을 둘러싼 북한의 권력 집단이 정보 공개에 극도로 민감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지 않을까.
아무튼.
다큐멘터리 작가, 다큐멘터리 영화감독들은 지금도 세상을 좀 더 인간적이고 조금은 더 아름답게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돈이 되지 않은 일을 왜 하고 있냐고 누군가는 말할지도 모르지만, 뭐 꼭 그런 것은 아니다. '화씨 911' 같은 경우, 다큐멘터리 영화로는 상상을 뛰어넘는 매출을 기록했다. 대략 2억2000 달러, 우리 돈으로 2000억 원을 훌쩍 넘기는 액수다. 제작비 600만 달러 영화였으니까, 약 370배의 수익을 올린 셈이다. 그 정도면 뭐 극영화 부러울 것도 없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