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내 대표 문학단체인 ㈔한국시인협회(회장 나태주)에서 ‘코로나 블루’에 빠진 국민들을 위로하기 위해 시선집(詩選集) 《포스트 코로나》(홍영사)를 발간했다. 시협(詩協) 출신의 저명(著名) 시인 430명이 코로나19를 주제로 쓴 시 1편씩을 묶은 책으로 ‘재난을 극복하는 희망의 힘’에 대해 노래했다.
시협 회장 나태주 시인은 머리말에서 “시는 결코 좋은 조건과 환경에서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나쁜 배경을 딛고서도 얼마든지 아름다운 시가 나올 수 있다는 것을 안다. 이를테면 ‘결핍의 축복’인 것”이라며 “코로나19는 잔인했지만 인류는 잔인하지 않았고 시는 더욱 그러했다”도 말했다. 나 시인은 “머잖아 우리 곁을 떠나줄 코로나19에게 급행열차 표를 사서 들려주고 싶다. ‘그만하면 됐으니 우리 곁을 떠나다오, 잘 가거라’”라며 “어떠한 순간에도 우리는 승리해야 한다. 시는 더욱 승리해야 한다”고 밝혔다. 이하 책에 실린 원로(元老) 시인들의 대표작 5편을 소개한다.
1. 포스트 코로나 – 나태주
세상이 많이
헐거워졌다
쓸쓸해지고
많이 늙었다
거리가 훨씬 느슨해지고
잡초가 무성해졌다
바람이 더 많은 하늘을 차지하고
구름이 많아졌다
가까운 사람 멀어지고
먼 사람은 더욱 멀어진 날들
잘 있겠지 그래 잘 있을 거야
만나서 밥이라도 한번
나누면 좋으련만
허!
어머니도 그 나라에서
편히 계시겠지요?
2. 코로나19 – 문효치
하느님이 보고 있다
지구가 마스크를 쓰고 있다
코를 막고 있다
입을 막고 있다
말할 수 없다 숨 쉴 수 없다
우주의 다른 별들
자유로운데
말 못하는 지구는 미쳐서 돌고 있다
우리는 모두 속에 갇혀
부글부글 끓고 있는 마그마
어딘가를 뚫고 튀어나오고 싶은
참고 있는 뜨거운 말들
나가고 싶은 말들의 좌충우돌
서로 부딪치며 다치고 깨어진다
뜨거운 지구가 철갑에 싸여 있다
3. 거리 두기에 대하여 – 신달자
당신의 이름은 확진자
두근거리는 가슴에 마른 천둥이 치네요
거리 두기를 하세요 조금 더 멀리 거리를 두세요
부르지도 않았는데도 온 것은 코로나19라는 독버섯
보이지도 않는데도 평생 낙인을 찍고 외면당하는 그 이름
코로나19
바이러스에 걸려도 걸리지 않아도 다 같이 앓는 질병
그것은 외로움입니다
바이러스가 아니라 외로움19로 할까요?
사람 만나지 못하고 가까이 가지도 못하고
속삭이는 것도 안 되고 눈도 맞추지 말라 하네요
모두들 의심의 가면을 쓴 사람들
모두들 외로움 확진자들이네요
모두들 홀로 얼굴을 덮고 텅 빈 거리를 걷고
텅 빈 방에 들어 혼밥을 먹는 이 시대에
시는 어디 있나요?
사랑은 어디 있나요?
즐거움은 어디 있나요?
“거리 두기”라는 말 무서워요
마음으로 마음이 다 닳을 때까지
그리고 몸이 서로 안을 때까지 우리 맑은 하늘을 바라봐요
당신
얼굴은 가려도 마음은 더 커졌어요
우리 싸워 이겨요 그리고 모두 사랑해요
당신.
4. 나는 누구인가 – 오세영
내 안에
나도 모르는 내가 또 있다니
참 나는 과연
누구인가.
‘무증상(無症狀)’이라는 화두 하나 붙들고
홀로
간화선(看話禪)에 든 면벽 14일,
코로나19 감염증의 그
자가 격리.
5. 문득 미라보다리 생각: 기욤 아폴리네르에게 – 이근배
창밖으로 마포대교 내려다보이는
한강변 H오피스텔 20층 쪽방에서
코로나19에 갇힌 틈을 타서 반생토록 끌어모은
벼루들을 바깥바람 좀 쐬어 주겠다고
먹 때를 벗기느라
이 봄 꽃피고 꽃 지는 줄도 몰랐다
벼루며 책들 들쑤시는데
웬 기욤 아폴리네르 시집?
고서경매장에서 쓸려들어왔던가
피카소가 짝지어준 마리 로랑생에게
바닥 모르고 빠져들었었는데
모나리자 그림 도둑으로 몰려서
사랑 날벼락 맞고 센 강 물결에 띄웠다는
시 〈미라보다리〉가 생각킨다
그때도 코로나가 있었던가
스페인독감에 걸려 서른여덟 살에
세상을 떠나고 세 해 뒤에야
잡지 「파리의 밤」에 실렸다던가
그대는 〈미라보다리〉 근처에 살았다 하고
나는 마포대교 가까이 둥지를 틀었는데
한강물을 굽어보면서도
뒤에 남길 시 한 줄도 못 쓰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