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도서출판·종합문예지 《문예바다》(대표 백시종)의 기획시선·서정시선집 시리즈 출간이 순항(順航)하고 있다. 서정시선집의 경우 읽기 좋고 휴대하기 편한 포켓형으로 출간돼 눈길을 끌었다. 시집의 권말(卷末)부록인 ‘서정을 향하다’ 코너도 백미(白眉)다. 기존 시집들은 대개 평론가 등 타인이 시편(詩篇)들을 비평하지만, 이 코너에서는 시인이 직접 자신의 작품세계를 고백하듯 해설하기 때문에 시단과 독자의 공감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서정시선집에는 이수익·윤석산·허형만 등 한국 서정시단(抒情詩壇)을 대표하는 중진 시인들이 지속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최근에는 주로 신예작가들의 작품세계를 조명하는 기획시선도 문을 열었다. 가장 익숙한 시집 판형에 전문 화가의 표지 디자인, 저명 시인의 추천사와 문학평론가의 집중 해설 등 정격(正格)으로 구성됐다.
이 시리즈들의 근간(近刊)으로는 한영옥 시인의 《사랑에 관한, 짧은》(서정시선집 4), 이기철 시인의 《저 꽃이 지는데 왜 내가 아픈지》(서정시선집 6), 정재원 시인의 《저녁의 책과 집을 잃은 노래》(기획시선 1) 등이 있다.
1973년 《현대시학》으로 등단한 한영옥 시인은 시집 《비천한 빠름이여》 《아늑한 얼굴》 《다시 하얗게》 《슬픔이 오시겠다는 전갈》 등을 펴냈고, 천상병시상·최계락문학상·한국시인협회상·전봉건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한 시인은 이번 시집에서 “시적 감성은 세계와 나의 의식이 겹치던 순간의 느꺼움, 혹은 어긋나는 순간의 당혹과 외로움에서 발산한다. 이어 느꺼움과 외로움은 고조된 감정을 빠져나와 서정의 세계로 연마된다”며 “나의 의식이 쏠리며 응집되는 순간의 아련함을 나는 코스모스(우주)의 기원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라고 추정한다. 그래서 시편들은 연애감정의 결을 지니게 된다”고 본인의 시세계를 고백했다.
1972년 《현대문학》으로 등단한 이기철 시인은 영남대 교수를 지내며 시집 《청산행》 《사람과 함께 이 길을 걸었네》 《흰 꽃 만지는 시간》 등과 비평집·에세이집·영역(英譯)시집 등을 펴냈다. 시와시학상·도천문학상·김수영문학상 등을 받았다. 이 시인은 이번 시집에서 “시를 쓰며 살아온 쉰 해, 나는 사람을 기다리며 그 기다림의 아름다움과 슬픔을 시로 써왔다. 그러다 보니 기다림이 내 삶의 세목이 되었다”며 “나는 환희보다는 비애를 사랑한다. 비애가 다가와서 내 마음의 문을 노크하지 않았다면 나는 시를 쓰지 않았을지도 모른다”고 진솔하게 토로했다.
2019년 《문예바다》로 등단한 정재원 시인은 이번이 첫 시집 출간이다. 강인한 시인은 추천사에서 “정재원의 시들은 조각보를 연상케 한다. 그 색깔은 원색이나 1차 간색 아닌 은은한 2차 간색을 사용한 것 같은 조각보다”라며 “머위 잎에 후드기는 투명한 새소리를 듣고 떨어지는 능소화를 보는 사람. 시인은 그렇게 환하고 따뜻한 사람이다”라고 말했다. 이하 각 시집의 대표작 1편씩을 소개한다.
한영옥 - 사랑에 관한, 짧은
짧음이라는 그 말은
너무 짧아 붙들 수 없네
짧음 곁에서 가쁜 숨 몰아쉬는 사랑은
더더욱 붙들 도리가 없네
이파리는 청청하늘에
꽃송이는 허허벌판에
뿌리는 캄캄한 벼랑에 뻗는
종작없는 나무 한 그루
온 밤을 기도로 지새워
간신히 형상을 세우려는 찰나
이파리는 이파리에게로
꽃송이는 꽃송이에게로
뿌리는 날카로운 벼랑으로
다시 뛰어 내려가네
한 그루 나무를 그릴 수 없었네.
이기철 – 꽃이 지니 잎이 피네
꽃 지고 잎 피는 방향으로 생을 옮겼다
그때 나는 나무에게도 생활이 있다는 믿음을 얻었다
저녁엔 꽃을 보내면서도 울지 않는 나무를 안아 본다
나무를 안으면 사랑에 빠질 것 같다
지상의 아름다운 한때를 오래 기억하려고
꽃자리 아랫단에 편 겹겹 잎자리
나쁜 이파리는 없다고 쓴 적이 있다
혈관을 터뜨리며 떠나는 저 붉음
떨어진 꽃잎을 주워 잎에 붙인다
다 닳은 봄을 주워 바늘로 깁는다
꽃이 지니 잎이 핀다
지는 꽃을 잎에 붙이는 것은
생과 사의 국경에 한참을 머무는 것
꽃이 마르는 동안의 기쁨을 사나흘만 간직하는 것
잃어버린 기타를 찾은 영화 속 소년처럼
정재원 – 저녁의 책과 집을 잃은 노래
언젠가부터 오래된 인간의 혀에 대하여
써서 버린 나에 대하여
앞장과 뒷장 건너다니며
책장 넘기듯 상동 호수공원을 돈다
까치와 비둘기가 번갈아 드나드는
미니 책방 7호
사람 없는 공원에서 사람처럼 웃는
애기똥풀과 달개비꽃에 대하여
벚나무 등을 타는 초록 이끼에 대하여
노인을 읽는 푸른 잎사귀와 아이를 짚어 주는 꼬리들에 대하여
수양버들은 길어진 문장 잘라 가며 자신의 이야기를 써가고
수면이 중얼중얼 구성을 읽는다
날개와 꽃들과 시간과 관계와 무수함은
어디서 온 책들일까
일을 마친 저녁이 문을 닫고
문맥 그러모으는 그 책방
나는 뿌리가 없는 나무의 발을 묻어 주려고
표지 검은 한 권의 흙을 숨겨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