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날은 2021년 1월 21일이었다. 인천국제공항으로 가는 길은 그다지 분주하지도 한산하지도 않았다. 겨울바람만 예고도 없이 도로를 횡단하거나, 이따금 ‘꽝!’ 하고 내달리는 고속의 승용차 정도가 잘 정비된 자동차전용도로에 긴장감을 주는 날이었다. 그때 우리가 탄 차는 어쩌면 드론으로 촬영한 부감 영상을 보는 듯 만곡의 긴 곡선 위를 소리 없이 굴러가는 하나의 무심한 점이었을지 모른다. 그날이 마침 350일 전에 떠난 큰애가 실습 학점을 따기 위해 귀국하는 날이 아니었다면 말이다.
우리 부부는 차 안에서 옥신각신 셈을 하고 있었다. 타이베이를 떠난 항공기의 도착 시각을 계산하고, 우리가 공항에 도착할 시간을 어림했다. 또한 입국 수속과 검역, 수하물 찾기에 걸리는 시간을 감안해 얼마나 기다려야 애를 만날 수 있을지 따졌다. 너무 늦게 집을 나섰다는 아내의 타박과 아직 충분하다는 남편의 항변 사이에 1년 만에 큰아들을 다시 만난다는 설렘이 흘렀다.
생각했던 것보다 아이는 말라 보였고 초췌해 보였고 힘들어 보였다. 그 순간 사전에 파악한 보건 당국의 제반 절차보다 중요하게 느껴진 건 한시라도 빨리 애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가는 일이었다. 된장찌개와 김치찌개와 자장면과 라면이 시급해 보였다. 한겨울 맹추위를 견디기엔 턱없이 허술한 윗옷과 바지와 외투였다. 우리는 서둘러 공항을 빠져나와 다시 만곡의 긴 곡선을 무심히 굴러가는 소리 없는 한 점이 되었다.
하지만 마음을 더욱 무겁게 한 건 강마른 큰아들의 핼쑥한 얼굴만이 아니었다. 아직 대만에는 둘째가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큰애보다 세 살이나 어린 작은아들은 겨우 대학 신입생이었지만, 짧은 겨울방학을 모두 격리된 채 보낼 수는 없다며 귀국을 포기했다. 코로나19 바이러스 확산 방지를 위해 한국과 대만 모두 외국에서 입국한 내외국인에 대해 2주간 격리를 의무화한 탓이었다. 두 나라에서 다 격리되고 나면 4주간의 겨울방학은 끝이었다.
사실 큰애만 해도 한 학기 동안 진행하는 실습이 아니었다면 귀국할 수 없었기에 작은애의 결단을 나무랄 수도 없었다. 대만은 약 170여만 원(39,000TWD)에 달하는 2주간의 격리 비용까지 피격리자에게 부담시키고 있었기 때문에 한시도 집 밖에 나가지 못할 거면서 귀국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큰애와의 반가운 해후에도 불구하고 둘째를 생각하는 우리 마음에는 깊은 그늘이 드리워질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동생을 두고 온 큰애도 마찬가지였다.
집에 도착한 시간이 곧 격리되는 순간이었다. 그로부터 14일 동안 큰애는 꼼짝 없이 자기 방에 갇혀 지내야 했다. 먹는 기계이면서 싸는 기계였고, 보고 듣고 흥얼거리는 기계이자 뒹굴뒹굴 자는 기계였다. 침대와 책상, 옷장과 TV와 핸드폰을 제외하고는 생물학적 경계를 넘어서는 어떤 것도 허락되지 않는 완벽한 차단이었다. 제어할 수 없는 바이러스 때문에 인간을 위해 인간을 통제하는 역설이 성립되는 시간이었다.
이와 같은 격리의 의학적 타당성을 판단할 능력은 없지만, 피격리자에게 부과되는 정신적•신체적 스트레스가 얼마나 강렬한 것인지는 큰애를 통해 실감할 수 있었다. 이성적 동물로서의 인간은 그에 앞서 무엇보다 동물임을 확인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사람은 움직여야 건강해지고 돌아다녀야 힘이 생긴다는 사실을 체감했다. 그렇기에 정부가 세금을 들여 제공해 준 격리 용품들이 달갑지만은 않았다. 햇반과 생수와 국거리와 카레가 한 상자 가득 들어 있었지만 모두 생물학적인 것이었지 사회학적 대체재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큰애는 가끔 한숨을 쉰다거나 기침을 하는 정도 외에는 무던히 견디어냈다. 너무 많이 잔다거나 아무 때나 잔다거나 하는 것도 탓할 수 없는 일이었고, 너무 적게 먹는다거나 골고루 먹지 않는 것에 이러쿵저러쿵 말참견할 것도 없었다. 14일은 설렘에서 지겨움으로 바뀌는 데 충분한 시간이었고, 한없는 정겨움에서 잊고 있던 짜증이 되살아나기에 넉넉한 기간이었다. 그렇게 큰애의 격리는 본인에게나 보호자에게나 이중적 스트레스를 제공했다.
그러고도 다섯 달이 지난 6월 24일, 마침내 둘째가 귀국했다. 1년 6개월 만이었다. 대학에 들어간 걸 축하할 새도 없이 1학년을 마치고서야 돌아왔다. 작은애의 격리도 동일한 조건, 동일한 방식으로 진행됐다. 둘은 체형도 다르고 성격도 다르고 방도 달랐지만, 비슷한 심리적•행동학적 반응을 보였다. 큰애가 그랬던 것처럼 작은애도 먹는 기계이면서 싸는 기계였고, 보고 듣고 흥얼거리는 기계이자 뒹굴뒹굴 자는 기계였다.
또한 정부가 제공한 격리 용품들은 이번에도 피격리자에게 적실한 물건이 못 되었다. 자기 집에서 부모랑 함께 있는 ‘자가 격리’였기 때문이다. 두 아이들은 외국에 있는 동안 먹지 못했던 아주 전형적인 한국음식을 아주 많이 먹었다. 김치와 된장만이 아니다. 삼겹살, 불고기, 닭볶음탕, 회무침, 동치미, 수제비, 생선조림, 어묵국, 파김치 등 자신들이 어릴 때 한번쯤 먹어 보았던 음식들을 참으로 골고루 만들어 달라고 했다. 결국 큰애와 작은애가 받은 상당한 양의 격리 물품들은 새 학기 개강을 앞두고 모두 대만으로 가져갔다. 모름지기 거기서는 아주 쓸모가 있었을 터이다.
둘의 자가 격리는 그렇게 끝이 났고, 큰애는 마침 한국음식을 소개하는 교양 프로그램을 만드는 프로덕션에서 실습을 했고, 작은애는 나름대로 철저한 계획을 세워 짧은 여름방학을 아주 길게 늘려 살았다. 큰애가 친구들과 즐긴다며 외박을 통보한 다음날 작은애가 비슷한 이유를 들어 같은 통고를 하는가 하면, 둘이 각각 친구네 집에서 자고 오겠다고 당당하게 알리는 날도 종종 있었다. 또 같은 고등학교를 다닌 선후배인 둘이 함께 동문 친우들을 대그룹으로 조직해 노는 날도 있었다. 물론 ‘사회적 거리두기’ 인원 제한을 따라 친소 관계를 적절히 적용했겠지만 말이다.
그러나 고국에서의 진정한 자유의 시간은 그것이 ‘진정한 자유’의 시간이었기에 너무나 짧았을 터이다. 실습으로 보낸 큰아이의 7개월도 그다지 길지는 않았겠지만, 둘째의 2개월은 너무나 짧은 시간이었다. 작은애는 1년 6개월 만에 귀국했었기 때문이다. 대만 생활 5년을 넘겨 대학 졸업을 앞둔 큰애는 몰라도 작은애는 한 학기 정도 휴학하는 것도 좋겠다는 의논까지 있었다. 아니면 바이러스가 잠잠해질 때까지 좀 더 길게? 그러나 둘은 8월 25일 함께 출국하기로 결정했다.
대만 유학을 결정하게 된 게 무엇보다 고급 중국어를 공부하기 위한 것이었으므로 아무리 바이러스가 기세등등하다지만 대학 생활 초기에 다잡아 공부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나름의 언어학적인 통찰에다 격리 비용 일부를 환급해 준다는 새로운 정보를 입수했기 때문이다. 사실 바이러스 사태만 아니라면 쓰지 않아도 될 큰돈을 14일 만에 써야 하는 강제적인 ‘시설 격리’는 부담이 아닐 수 없었다. 170만 원이면 한 학기 대학 등록금의 대략 70%에 해당하는 금액이었고, 두 아들의 격리 비용을 합하면 무려 340만 원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대만 정부가 격리 비용 가운데 총 1만4000TWD(약 60만 원)를 환급해 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둘의 생활비가 한 달에 각각 50만 원이었으니 그것을 상회하는 비용을 아이들에게 돌려준다면 비록 어려움이 있어도 가서 공부를 하는 게 옳았다. 그래서 두 아이는 서로 짧았던 ‘진정한 자유’의 시간을 아쉬워하면서 함께 출국했다. 그에 앞서 PCR 검사는 물론 거류증 유효기간 갱신, 여권 유효기간 체크 등 대만 정부가 요구하는 제반 조건을 충족했음은 물론이다.
두 아이는 제주도보다 조금 아래쪽에 있는 대만에 2시간 35분의 비행 끝에 당일 오후 도착해 곧바로 강제 시설 격리에 들어갔다. 실명을 공개할 수는 없지만 호텔은 한국의 평범한 모텔과도 비교하기 힘든 열악한 숙소로 보였다. 창살이 있는 밖으로 옆 건물들의 옥상이 보이는 전망은 갇힌 자의 마음을 더욱 옥죄는 듯한 느낌까지 들었다. 또 밖으로 나갈 수 없기 때문에 ‘밖’을 가린 커튼 너머로 한낮의 푸른빛은 스산한 기운마저 감돌았다.
큰애에 따르면 음식은 “그냥 밥에 야채랑 고기 조금 있는 도시락”이었으며, “맛은 그냥 대만 맛이 너무 강했다”고 한다. 그런데 외부 음식을 배달시켜서 먹을 수 있도록 허용했기 때문에 두 아이는 물론 많은 사람들이 이미 지급한 격리 비용으로 제공되는 식사가 아니라 추가 비용을 들여 외부 음식을 사먹었다고 했다. 작은아이에 따르면 칫솔과 치약 등 세면도구와 위생용품은 필요한 만큼 공급되었으나, 보안과 청결은 여관 정도였고 가끔은 바퀴벌레가 나오는 방도 있었다고 한다.
아직 어린 두 아들이 그런 열악한 곳에서 14일씩이나 강제로 격리되어야 했기에 굳이 대만으로 유학을 보낸 것이 아이들 미래에 좋은 일이라고 호언했던 나 자신이 미워지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그 경비가 아이 하나당 170여만 원이었으며, 그 가운데 대만 정부가 환급해 주겠다던 60여만 원은 무려 6개월이 지났어도 지급되지 않았으니 말 그대로 유구무언이었다.
“하루에 움직일 수 있는 행동반경이 방밖에 없으니까 너무 답답했고, 14일 동안 너무 지루하고 힘들었는데 같이 격리되어 있는 사람들이랑 전화통화하고 영상통화하면서 힘들게 잘 버텼던 것 같아요. 그거 아니었으면 14일 동안 누구랑 말할 기회도 없어서 진짜 지루했을 것 같아요, 그리고 격리 동안 자고 싶을 때 자고 일어나고 싶을 때 일어나니까 수면 시간이 확실히 늘어났던 거 같아요.”
고국의 부모와 함께 자기 집에서 하는 ‘자가 격리’와 외국에서 혼자 강제로 당하게 되는 ‘시설 격리’의 차이는 실로 큰 것이었다. 위 인용문은 ‘코로나19 예술로 기록’ 사업에 참여하기 위해 아이들에게 보내 달라고 부탁한 소감의 한 대목이다. 특별할 것 없이 반복되는 나날이 14일간 지속되는 동안 아이가 느꼈을 모종의 무기력감이 글에서 느껴진다.
그러는 가운데 지난해 12월 필자는 주한국대만대표부에 격리비용 환급 문제에 관해 대만 정부의 입장을 알려 달라고 전화와 이메일로 문의를 했다. 요지는 국가가 환급해 주겠다고 안내한 격리 비용을 특별한 예고도 없이 장기간 지급하지 않은 것은 부당한 처사이며 조속히 지급해 주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주재국 국민의 한 사람이 신원을 밝히고 문의한 데 대해 한국 주재 외교관은 다행히 불과 5일 만에 신속히 답장을 보내 주었다.
그러나 관계자의 메일은 매우 건조하고 의례적인 것이어서 아쉽기 그지없었다. 환급과 관련한 자세한 규정은 대만 위생복리부 규정에 포함되어 있으며, 그것을 한자가 득시글한 원문 그대로 PDF 파일을 첨부해 주었다. 또 자세한 내용은 해당 부처에 직접 전화해서 문의하라고 했다. 중국어에 서툰 사람이 한국에 주재하고 있는 대표부에 문의한 것이 바로 언어 때문이었음을 고려하지 않은 매우 비외교적인 처사로밖에 볼 수 없었다.
먼저 보내주신 소중한 메일 감사드립니다.
어디서 관련 규정을 찾아보셨는지는 모르겠지만 대만 위생복리부 사이트를 통해 확인해 본 결과, 환급 조건과 관련된 내용은 하단 링크를 통해 확인 가능합니다.
http://covid19.mohw.gov/tw/ch/cp-5188-61209-205.html
대만 위생복리부 사이트에 안내된 내용에 따르면, 대만에 자가격리하는 외국인에게만 보상을 해주지 않는 것이 아닌, 격리자 보상을 받고자 하는 자(대만 국민 및 외국인)는 필히 첨부해드린 대만 위생복리부 규정의 특정 조건을 만족하여야 합니다.
자가격리 비용 일부 환급과 관련 사항은 본 대표부 규정이 아닌 관계로 본 대표부에서 답변 드리기가 어려운 점 양해 부탁드립니다.
해당 내용과 관련된 자세한 문의는 대만 위생복리부 02-8590-6666에 문의해 주시기 바랍니다.
- 주한국대만대표부가 보낸 메일 내용
그럼에도 사실 확인을 위해 꽤 오래 유학 중인 큰애의 노력으로 규정의 내용을 파악해 본 결과 아주 엄격한 환급 기준이 있었다. 가능한 대략적으로 다음과 같았다. (1)업무상 출장, (2)장례를 치르기 위해 국외로 가는 행위, (3)친족이 위독하거나 중상을 입고 수술을 받아야 하는 경우, (4)의료인이 인정하는 진료를 위해 국외 출국이 필요한 경우 등등. 이는 사실상 국경 통제에 해당되는 수준이었다.
무엇을 근거로 어린 유학생이 방학 중에 귀국하여 자신의 부모를 만나는 행위가 중요하지 않은 일이라고 판단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물론 그밖의 다른 국가에 유학하고 있는 한국인 학생들의 경우에도 이와 유사한 규정을 모르고 귀국했다가 아예 학업까지 중단되고 만 사례가 있다고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음성판정을 받은 PCR 검사는 물론이고 코로나19 바이러스와 관련한 제반 조건조차 제시하지 않고 사실상 국경을 차단한 대만 정부의 조치가 정당하다고 할 수는 없었다.
지난해 각각 1년과 1년 반 만에 귀국했던 큰아들과 작은아들이 공부를 위해 대만으로 들어간 지 벌써 만 5개월을 넘겼다. 이번 겨울방학에도 두 아이는 귀국하지 못한다. 무엇보다 지긋지긋한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진정되지 않은 탓이고 방학 기간이 짧은 때문이지만, 특히 가성비 극악의 대만의 시설 격리 비용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한 학기 대학 등록금의 70%에 해당하는 금액을 여관 수준의 호텔에서 14일 동안 도시락 먹으며 쓰게 한 것을 두 아이는 이미 몸으로 겪었다.
그렇다면 올해도 둘은 고국의 ‘자기 집’에서 보신하며 재충전할 시간을 빼앗긴 셈이다. 현재와 같은 조건이라면 다가오는 여름방학 때도 마음 편히 귀국할 수 없을 가능성이 높다. 바이러스가 잠잠해진다면 더없이 좋겠지만, 만일 그렇지 못해 귀국하지 못한다면 어쩌면 두 아이는 장기간 외국에 억류된 신세나 다를 바 없어진다. 국가의 제도적 장벽으로 인해 거주 이동에 심각한 제한을 당하는 것은 분명 조르조 아감벤이 말한 ‘호모 사케르’(Homo Sacer)에 해당할 터이다. 물론 억류의 주범은 코로나19 바이러스지만 말이다.
두 아들을 생각하며, 또 한국의 바이러스 상황을 직시하며 적은 졸시(拙詩) 한 편을 부기하면서 ‘코로나19 예술로 기록’의 한 단상을 마무리한다.
초월성이 내재적인 것 안에 있다는*
바이러스가 온 나라에 퍼져 수백 명 목숨을 앗아간
이 계절은 초록이라고
눈부시다고
마스크를 낀 색색의 옷깃 나풀거리는
거리의 사람들
손을 잡고 걸어오는 초로의 부부와
두 마리 개에 끌려가는 여자와
괴성을 지르며 달려가는 어린것과 젊은 엄마와
버스를 기다리는 한 중년이
서로 반갑다며
서로 기쁘다며
말없이 지나치는
자동차는 달리다 멈추다
도로는 끊어졌다 이어지다
사람들은 기다리다 건너다
종점 근처 정류장에
버스는 오지 않고
거리는 사람들의 행렬
환호성의 행렬
소리 없는
* 질 들뢰즈•펠릭스 가타리, 『철학이란 무엇인가』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