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는 최근 수년간 중국과 패권경쟁을 벌이는 미국의 대중 전략에 적극 호응하며 안보와 경제발전 전략을 쇄신했다. 핵심은 미국의 대중 견제정책인 쿼드(QUAD) 가입이다. 안보적으로 인도는 쿼드를 통해 강화된 자유진영과의 군사협력을 통해 지정학적 갈등을 겪고 있는 중국에 대한 안보이익을 제고했다. 경제적으로 인도는 쿼드를 안보 및 경제 파트너쉽으로 격상하는 미국의 의도를 활용하며 제조업 강국으로의 발전을 추진 중이다. 구체적으로 인도는 대규모 산업단지 개발과 세제 혜택을 통해 탈-중국을 추진하는 다국적 기업의 자국 유치를 도모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IT 기술력과 영어 구사 능력, 젊은 인구 구조 등은 인도의 부상 가능성을 낙관할 수 있는 요인으로 주목받고 있다.
인도의 이와 같은 움직임은 패권경쟁과 국제 생산라인의 조정을 염두한 선제적이며 적절한 전략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도로부터의 또 다른 뉴스들은 암울하다.
집단 성폭행을 당한 후 나체로 전봇대에 묶여 있었던 인도 여성은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아직 의식 불명 상태라고 한다. 신랑이 박식하다는 중매쟁이의 말을 의심했던 인도 신부는 결혼식 당일 신랑에게 구구단 2단을 외워보라 했으나, 입도 떼지 못하는 신랑을 보며 결혼식장을 나가버렸다. 또한 최근 코비드19 확산으로 일부 인도 시민들이 예방 차원에서 소 분뇨를 몸에 바른다는 보도도 있었다.
2019년 경찰 집계 성폭행 사건 3만2033건, 15분마다 소녀 혹은 여성이 강간당한다는 통계는 인도에서의 성폭행이 개인의 비극인 동시에 사회적 병리현상인 근거이다. 결혼식 날의 불미스러운 사건은 낮은 교육 수준과 중매결혼의 폐해를 의미한다. 미비한 보건의료 인프라와 인습 역시 인도의 발전에 관한 근래 낙관적 전망과는 사뭇 대치되는 상황으로, 제조업 유치와 경제발전이 가까운 장래의 인도를 썩 괜찮은 대국으로 격상시킬 것이란 전망이 어려운 이유이다.
필자가 지목하고 싶은 요인은 국부(國父)의 '나라 만들기(Nation building)' 비전
탈-식민 과정에서 인도의 민족지도자들은 힌두교를 기반으로 하는 '종교 공동체주의(Communalism)'를 주창했다. 이와 같은 종교 이데올로기는 독립과 건국 과정에서 정서적 구심점 역할을 수행했으나, 이슬람에 대한 미움과 과거(전통)로의 회기를 의미했다. 인도-파키스탄 분리와 지금까지 이어지는 인도 내 이슬람 탄압, 카스트 제도와 관련 인습의 존속은 구체적 현상이다.
요컨대 인도의 국가건설 비전이었던 종교 공동체주의는 '근대적 국민국가 건국'을 대체했던 건국 이데올로기로, 힌두교의 국가권력 장악과 근대화 지체라는 결과를 야기했다.
주목할 점은 그 주역의 인생 경로이다. 물레와 소금행진으로 기억되는 민족 지도자 간디는 영국 법률가로 역시 영국의 식민지였던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변호사로 활동했다. 대영제국의 문명을 경험하며 양복을 입고 커리어를 쌓았던 그는 왜 자국의 독립과 건국의 비전으로 전통적 힌두 공동체로의 회귀를 선택했을까.
근대적 국민국가 건설에 대해서, 경험해 보았더니 별로라고 느꼈을 수도 혹은 그것이 인도가 지향하기에는 너무 어려운 비전이라고 생각했을 수 있다. 어쩌면 정말로 가난하지만 정감 있는 과거에 대한 로망이 있었는지도, 만에 하나 힌두 이데올로기가 정치 권력 장악의 용이한 방법이라고 판단했을 수도 있겠으나,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수 인도인의 삶을 보았을 때 좋은 선택은 아니었다.
서구의 부(富)와 민주주의를 경험했던 그는 개인의 자유와 존엄을 전제로 하는 국민국가로의 경로를 선택했어야 했다. 의도는 좋았을 것이란 말은 불가하다. 수많은 개인 그리고 국가의 생명과 관련된 국가 지도자의 판단과 행동은 의도가 아닌 결과로 평가되어야 한다. 어린 아이의 실수처럼 '모르고 한 것이니 괜찮아, 앞으로는 그러지 말자'라고 위로와 교훈을 전할 사안이 아니다.
대한민국과 이승만
같은 시기 더욱 열악했던 안보 및 사회경제적 환경 속에서 우남은 자유인의 공화국을 꿈꾸었다. 조선과 일제 하에서 고단한 세월을 보냈던 한국인 개개인이 자유롭고 존엄한 삶을 살 수 있도록 말이다. 이를 위해 그는 자신이 경험했던 최고의 정치제도 즉 미국식 자유민주주의를 건국 비전으로 삼고 실천했다.
삼권분립과 언론의 자유 등은 북한과의 대치 상황 속에서 초기 대한민국의 나라 세우기 과정이 더욱 지난했던 이유이다. 그럼에도 초대 대통령은 자유 민주주의에 대한 일관된 신념으로 국제 공산주의의 팽창에 맞서며 자유로운 개인이 주도하는 근대화의 초석을 마련했다. 최고의 것을 내 나라 사람들이 누리게 하겠다는 건국 주역들의 사랑과 의지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이들이 조선 반상(班常) 질서로의 회귀, 농촌 유교 공동체의 재현 등을 국가 만들기의 비전으로 삼았다면 지금 우리의 삶은 어떠했을까. 그들은 새로운 특권 계급이 되었겠으나 말이다.
동네를 편하기 돌아다니기 어려운 여성들, 신분제의 인습 속에서 고단한 삶을 사는 사람들, 신념의 차이로 인해 박해 받는 이들, 그들의 눈물과 좌절로부터 국부 간디는 자유로울 수 있을까. 그럼에도 간디는 여전히 존경과 사랑을 받는 건국의 상징이며, 인도의 지폐에는 그의 초상화가 그려져 있다.
같은 시절, 자유롭고 존엄한 개인이 이끄는 번영한 대한민국을 꿈꿨던 건국 대통령의 비전과 헌신이 다시금 감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