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6년말 광화문 촛불집회 현장. 사진=조선일보DB

영화진흥위원회(영진위)가 김정남 암살 사건을 다룬 영화 '암살자들'을 예술영화로 인정하지 않으며, 국내 개봉이 불투명했었다. 이에 수입·공동배급사 측은 영진위의 결정에 이의를 제기하며 항의 방문했다. 결국 지난달 29일 영진위는 재심을 통해 '암살자들'을 '예술영화'로 인정했고 국내 개봉이 가능해졌다. 

김일성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의 국내 판매가 가능한 시절, 해외 유수 영화제에서 작품성을 인정받은 영화조차 볼 수 없을 뻔했다는 사실에, 영화 예술계의 정치적 성향에 대한 문제 제기가 나타난다. 

◇ 영화예술계가 좌편향일 수밖에 없는 이유

대개의 나라에서 영화예술계는 좌성향이다. 당연하다. 공급자와 수요자 모두에게, 자유민주주의 헌정과 시장경제 하에서의 일상은 아무런 매력이 없다. 배경은 기본적으로 부조리하고, 상처 많은 주인공은 분노하고 저항해야 한다. 변화와 전복의 네러티브는 필수다. 급진(急進, radicalism)과 혁명을 향한 로망과 실천은 드라마를 가능케 하기 때문이다.  

- 실제로 혁명은 그러했는가

영화와 달리, 역사 속 혁명의 결과는 수많은 사람이 삶으로 책임져야 하는 지난한 현실이었다. 혁명은 더 나은 세상을 만들지 못했고, 악이 차악을 이긴 것인지 차악이 악을 이긴 것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경우가 허다하다. 오히려 갈등과 혼란은 개인 자유와 존엄 확대라는 역사와 문명의 응당한 방향성에 역행하거나 지연시켰다. 

프랑스 혁명은 왕과 수많은 사람들 그리고 길로틴 박사까지 길로틴(단두대)에서 효율적으로 제거하며 무엇인가를 해보려고 했으나, 선혈이 낭자한 혼란 후 왕정은 복구됐다. 러시아 혁명은 20세기 1억 명의 생명을 앗아갔던 사회주의 혁명과 실천의 시작이었다. 그리고 70년 후 종주국 소련은 힘없이 무너졌다. 모든 권위를 타도하자는 문화대혁명의 실질적 목적은 마오의 권력 재탈환이었고 결과는 파괴와 상처였다. 마오이즘(Maoism)에 감명받았던 프랑스 68혁명의 주체들은 죽의 장막 넘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정확히 알고는 있었을까. 촛불혁명 이후 우리 사회는 더 정의로워졌고, 우리 삶은 더 행복해졌는가.   

- 르쌍띠망(Ressentiment·앙심) 

천사에게 숙소를 제공해준 가난한 부부가 있었다. 천사가 소원을 하나 말하라고 하자, 부부는 조용히 의논했다. 잠시 후 부부는 '옆집에는 매일 젖을 제공하는 염소가 있다’고 말했고, 천사는 염소를 한 마리 선물하면 되겠다고 생각했으나 부부의 소원은 '옆집 염소를 죽여주세요'였다.  

미움과 증오, 앙심은 혁명의 동력이다. 혁명가들은 대중을 선동해 기존 질서를 전복한다. 혼자 있을 때는 폭력과 거리 먼 사람들이 군중 속에서 더없이 잔인해지는 것은, 혁명가들이 제시한 '정의'가 이들 마음속 르쌍띠망을 제대로 발동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혁명가들은 이들의 힘을 빌어 정치경제적 권력을 장악한 후에는, 르쌍띠망을 표현조차 하지 못하는 무서운 체제를 구축한다. 역사의 퇴보이다. 

◇ 도덕적 소수

주의해야 한다. 미움과 증오는 아무런 선한 것을 이뤄내지 못한다. 

개인의 자유와 존엄을 확대하고 풍요를 이루는 것 즉 진정한 발전과 진보의 주체는 영성을 지닌 '도덕적 소수'이다. 이들은 지향하는 미덕을 향해 연속성 있게 나아간다. 또한 비물질적이며 언행일치한다. 절대자 앞에 단독자로 서는 이들은 한층 높은 도덕 기준을 가졌고, 사람과 환경이 주는 유인은 미미하다.   

물질과 힘의 논리로부터 자유로운 이들은, 국가 경제의 40%를 차지하는 노예무역 금지를 이뤄냈고, 노예제도 철폐를 위해 정치 생명을 걸었다. 스스로 귀족이 될 수 있었으나 약한 정부를 가진 자유인의 공화국 국민이 되었고, 최대 핵보유국을 악의 제국으로 지명하며 냉전에 종지부를 찍었다. 역시 주변에 통일된 강대국이 생겨나는 지정학적 위험을 감수했던 도덕적 소수들과 함께 말이다. 물론 완벽하지 않은 인생들로 실수와 결함이 있었으나 노력했고, 그 동력은 세상과 사람으로부터의 인정과 물질이 아니었다. 영적 존재로서 가진 깊은 도덕심이다. 역시 미움과 분노가 있었겠으나, 그 대상은 개인의 자유와 존엄을 억압하는 자들과 시스템이었다. 

◇ 미덕과 무관한 것들

도덕적 소수의 미덕은 견문과 무관치 않지만 견문을 그대로 반영하지 않는다. 청소년 시기를 스위스에서 보내며 NBA를 좋아했던 김정은의 북한은 할아버지 아버지의 북한과 차이가 없다. 런던 안과의사 출신의 시리아 대통령은 금융인 출신의 부인과 함께, 독재 체제 유지를 위해 화학무기까지 사용하며 자국민 50만을 죽였다. 시리아 내전은 중동 정치의 혼란을 가중시켰으며, 자국을 탈출하는 시리아 난민 유입은 유럽국가의 대내외적 갈등의 주요 원인이다. 이들은 공히 경험한 자유와 번영을 특권으로 점유·강화하기 위해, 자국민의 자유와 번영 나아가서 생명을 외면한다. 영적이며 도덕적인 성찰이 누락된 물리적 견문의 한계이다. 헌신과 방향성이 부재하며, 문명사적 발전과는 요원하다.    

미덕과는 관계가 전무한 위의 경우를 차치하고, 미덕은 일견 유사한 가치들과 구분되어야 한다. 미덕은 결과를 생각지 않는 온정주의와 다르다. '따뜻한 자본주의'와 같이 가치 중립적 대상에 긍정적 형용사를 붙이는 농단과 무관하며, 개인의 슬픔을 집단의 슬픔으로 확대해 정책 목표를 이루는 정치와는 더더욱 거리가 멀다. 

◇ 도덕적 다수를 소망하며

도덕적 소수는 개인 자유와 존엄 확대를 향한 자유인의 역사를 선도했고, 우리가 누리는 좋은 것은 그 열매이다. 감사와 겸손의 마음으로, 각자의 영역에서 자유인의 역사의 연속성을 이어갈 도덕적 다수를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