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44년 6월 노르망디 상륙작전. 사진=미 국방부 페이스북 캡처

7월이다. 한 해의 하프라인 지점을 통과하는 것보다, 각별한 6월을 지냄이 아쉽다. 2021년 6월을 보내며, 연합군이 노르망디에 상륙한 1944년과 공산주의 팽창전쟁이 한반도에서 발발한 1950년의 6월을 기억한다.  

◇ 전체주의의 확장

- 백색 전체주의 히틀러의 계획

히틀러에게는 계획이 있었다. 유럽을 손에 넣고 미국과 힘의 균형을 이룬다는 것으로, 몇 개의 치명적 오판이 없었다면 가능했던, 인류에게 아찔한 계획이었다. 추진배경은 당시 유럽에 팽배했던 이상주의였다. 1차 대전의 지옥 같던 참호전을 기억하는 유럽인들의 집단적 PTSD(외상후 스트레스 장애)는 평화에 대한 믿음과 의지의 근원이었고, 지극히 뻔한 히틀러의 군국화를 용인하며 나치 팽창을 위한 시공간을 제공했다. 독일인들 역시 평화를 원했다. 그러나 합법적으로 통치할 생각이 없었던 자에 대한 합법적 권력 선사는, 전체주의 팽창이라는 달리는 호랑이의 어깨에 올라 앉는 것이었다. 

- 적색 전체주의 스탈린의 계획

역시 적색 전체주의와의 공조가 가능하다고 믿었던 루즈벨트는 스탈린의 성공대로를 닦아주었다. 독소 조약으로 히틀러의 성장을 은밀하게 지지했던 스탈린은, 이를 어겼던 독일을 상대로 자신의 전쟁을 한 것이었으나, 루즈벨트의 이상주의적 태도 하에서 냉전의 한 축으로 성장했다. 공산주의 혁명기술과 민족주의를 적절하게 활용하며 동유럽을 죽의 장막 안으로 흡수했던 노련하고 잔인한 스탈린에게, 북한 공산화는 난이도 '하'에 해당했다. 한반도 공산화가 북한에서 멈췄던 것은 군국주의 일본과 싸우며 태평양을 건너온 미국에 대한 스탈린의 자기절제였다. 이에 6·25 발발은 김일성의 적화통일 야욕과 스탈린의 공산주의 팽창 전략의 결과이다.  

◇ 자유를 위한 희생

덩케르크 탈출 1년 만인 1944년 6월 6일 연합군이 노르망디에 상륙했다. 높은 파도와 긴장 속에서 감행된 그날 오버로드 작전(Operation Overload)에서, 전체주의로부터 유럽을 구하기 위해 전쟁에 참전했던 자유 진영 청년들 1만 명 이상이 희생됐다. 이후로 '균형을 잃은 싸움'이 전개됐고, 나치 독일은 패배하기 바빴다. 

3년 간의 6·25 전쟁에서 역시 수많은 청년들이 희생됐다. 우리의 참전용사들은 태어난 지 2년 된 신생국가를 위해, 세계 각지의 청년들은 공산주의 팽창으로부터 한번도 본 적 없는 나라를 지키기 위해 이 곳에 왔고 죽어갔다. 

나치의 패망 그리고 지금 우리가 누리는 자유와 번영은, 인간은 자유롭고 존엄하다는 이들의 믿음 그리고 그 실천을 위해 역사의 옳은 편에 섰던 헌신 덕분이다. 

단지 비통한 점은 선배 정책결정자들이다. 국제정치와 역사에 대한 이해가 있었다면, 정치적 업적에 대한 욕심이 없었다면, 전체주의 팽창에 대한 이른 억제가 가능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가정 폭력을 휘두르는 사람도 좋을 친구일 수 있다고 스스로와 국민을 기만한 사람들 말이다. 유대인을 아우슈비츠에 보내거나 생각이 다른 사람을 강제수용소로 보내는 이들과의 대화는 시간 낭비이며, 협력은 기만의 여지임을 몰랐다면 어리석고 알았다면 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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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25전쟁 국군 장병들.

◇ 반대쪽의 청년들

나치 독일과 조중(朝中) 연합군의 청년들은 각자 좋은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문학과 예술에 남다른 조예를 가졌으며, 지성과 성실함으로 눈부신 공업 발전을 이뤄냈던 독일인들이다. 독일인의 분별이 위대한 게르만 제국 건설이라는 전체주의적 비전을 배척했다면, 내재된 르상티망(ressentiment)이 배타적 민족주의에 반응하지 않았다면, 독재 체제 성장에 힘을 보탠 후 사지(死地)로 보내지는 일은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많은 나치 장교들이 히틀러의 목적과 방식에 반대했고, 20만 독일 여성들이 소련군에 의해 강간당했으며, 드레스덴 폭격으로 수많은 시민이 죽었으나, 이들은 말 할 자격이 없다. 기만과 오판으로, 역사의 틀린 편에 섰기 때문이다. 

스탈린은 감정 과잉 히틀러의 업그레이드 버전이다. 냉정한 자세로 6·25의 조정자 역할에 충실했고, 북한과 긴 국경을 접하는 중국의 지정학적 고민을 활용했다. 조중 연합군의 중공 측 선발대는 사회주의 건설을 조선 독립의 비전으로 삼았던 무장 독립운동 세력이었다. 이들은 마오쩌둥의 편에서 국공내전을 승리로 이끌며 중화인민공화국 건국에 기여했고, 이후 6·25에 보내졌다. 마오에게는 지정학적 이익 수호이자 공산주의권에서의 지분 확보, 나아가서 잠재적 도전자 제거의 일거삼득(一擧三得)이었다. 우리에게는 전쟁의 심화와 연장, 그리고 북한의 존재이다. 생명의 손실은 6·25부터 지금의 북한으로 이어지는 가장 큰 아픔이다.  

◇ 역사의 옳은 편

많은 참전용사들이 유럽과 대한민국의 발전과 번영을 확인하며 자신과 전우의 헌신의 이유를 확인했다. 그러나 대단한 기세였던 히틀러의 백색 전체주의와 스탈린의 적색 전체주의가 저지될 수 있었던 것은, 노르망디 해변 또 낯선 한반도에서 죽어갔던 용사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승리와 열매를 직접 보고 확인하지는 못했지만, 자유와 존엄의 확장을 위해 싸웠던 이들은 역사의 영웅이다.

반대편에서 죽어갔던 이들을 위한 눈물을 오롯이 개인의 슬픔이다. 역사에 역행하는 노력과 용기 역시 미담이 아니다. 가시적인 힘의 크기와 달콤한 레토릭이 아닌, 가치가 중요한 이유이다. 

히틀러는 자살했고 스탈린의 미라는 격화 운동 이후 화장(火葬)되었다. 공산당 창당 100주년을 축하하는 중국만이 항미원조(抗米援朝)의 위대함을 강조한다. 때로는 지연되는 자유인의 역사 속 중국과 북한을 생각하며, 7월을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