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법무부가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가석방(假釋放)을 결정했다. 이 부회장은 박근혜 전 대통령과 최서원(개명 전 최순실)씨에게 경영권 승계 등을 도와달라는 청탁과 함께 뇌물을 건넨 혐의로 지난 1월 파기환송심에서 징역 2년 6개월을 선고받고 법정구속돼 서울구치소에 수감됐다. 2017년 2월 박영수 특검팀에 구속돼 2018년 2심 판결에서 집행유예로 석방되기까지 353일 동안 구치소에 수감된 데 이은 재수감이었다. 이번 가석방 결정으로 이 부회장은 재수감 207일 만에 다시 자유의 몸이 됐다. 이 부회장은 구속 수감으로 지금까지 형기(刑期)의 약 62%를 복역한 상태다.
법무부는 9일 오후 정부과천청사에서 8·15 가석방 대상자 심사위원회를 개최, 가석방 신청자 총 1057명 중 이 부회장을 포함한 810명에 대해 ‘가석방 적격(適格)’으로 의결했다. 8·15 가석방은 오는 13일 시행된다. 박범계 법무장관은 이날 오후 6시 40분경 정부과천청사 법무부 건물에서 진행된 언론 브리핑에서 “이번 가석방은 코로나 장기화로 인한 국가적 경제상황과 글로벌 경제 고려 차원에서 이재용 부회장이 대상에 포함됐다”며 “사회의 감정, 수용 생활 태도 등 다양한 요인을 종합 고려해 결정된 것으로 알고 있다”고 밝혔다. 박 장관은 “이번 광복절 기념 가석방은 경제 상황 극복과 감염병에 취약한 교정시설의 과밀 환경 등을 고려하여 허가 인원을 크게 확대했다”며 “앞으로도 이러한 확대 기조를 이어나가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이 부회장에 대한 가석방이 시행됨에 따라 삼성은 ‘총수 부재’라는 리스크를 털어내게 됐다. 그간 지연됐던 신규 투자나 인수합병(M&A) 등 대규모 사업 추진이 다시 점화(點火)될 것으로 관측된다. 이 부회장의 삼성 복귀 등 구체적인 경영 행로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고 있다. 다만 죄와 형을 면해주는 사면(赦免)이 아닌 ‘조건부 석방’이 단행되는 만큼, 경제사범에 적용되는 ‘5년 취업제한’ 족쇄(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에 걸려 이 부회장의 직접적인 일선 경영은 불가할 것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법무부의 보호관찰을 받는 이 부회장은 해외 출장과 거주지 이전을 할 때 법무부의 사전 승인을 받아야 하는 등 활동에 제약이 많다.
13일 석방되는 이 부회장은 선친(先親)인 고(故)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 안장(安葬)된 경기 수원의 삼성 일가 선영(先塋)을 찾아 참배하는 것으로 첫 외부 일정을 시작할 것으로 보인다. 이후 17일 열리는 외부독립기구인 삼성 준법감시위원회 정기회의에 참석, 삼성의 대국민 신뢰 회복 방안을 강구할 것으로 전망된다. 이 부회장은 작년 5월 발표한 ‘대국민 사과문’에서 경영 쇄신책으로 “자녀에게 경영권 승계를 하지 않겠다. 무노조 경영을 폐기하겠다. 노동 3권을 보장하겠다”고 역설한 바 있다. 작년 말 파기환송심 최후진술에서는 “회사의 성장은 기본, 부당한 압력에 거부할 수 있는 준법감시제도를 만들겠다”며 “삼성을 준법을 넘어 최고 수준 투명성과 도덕성을 갖춘 회사로 만드는 것을 제가 책임지고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이 부회장의 첫 경영 복귀 현장으로는 경기 평택 반도체 생산시설과 삼성바이오로직스의 코로나19 백신 위탁생산시설이 될 것으로 전망된다. 특히 반도체 혁신 경영에 박차를 가할 것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삼성전자는 2019년 메모리 반도체뿐 아니라 시스템 반도체 분야에서도 세계 1위를 달성하겠다는 ‘시스템반도체 비전 2030’을 발표했다. 오는 2030년까지 시스템 반도체 분야 연구개발(R&D) 및 생산시설에 총 133조 원을 투자하고 전문 인재 1만5000명을 채용하겠다는 계획이었다. 이후 경기 화성·평택에 파운드리(반도체 위탁 생산) 초미세공정 구현을 위한 극자외선(EUV) 라인을 조성하고 대규모 투자와 인력 확충에 나섰다. 그러나 이 부회장이 재수감된 올해부터 해당 계획은 사실상 중단된 상태였다. 또한 170억 달러(약 19조 원) 규모의 미국 파운드리 제2공장 건설 계획이 아직 미정(未定)된 상태임에 따라, 재계(財界)는 이 부회장이 복귀 후 해당 건에 대한 투자를 전격 발표해 다시금 반도체 혁신 경영의 기치(旗幟)를 내걸 것으로 보고 있다. 반도체 외에도 5G·모바일·인공지능 등 삼성의 신산업 분야와 코로나19 백신 확보 등 국가적 현안에 있어서도 이 부회장의 역할이 요구될 것으로 점쳐진다.
주요 경제단체 등 재계는 논평을 내고 법무부의 이 부회장 가석방 결정에 대해 환영의 뜻을 밝혔다. 전국경제인연합회는 “인텔, TSMC 등 글로벌 기업과의 경쟁이 치열한 상황에서 우리나라가 글로벌 반도체 시장에서 기술적 우위를 점하고 나아가 새로운 경제질서의 중심에 서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밝혔다. 대한상공회의소는 “기업의 변화와 결정 속도가 중요해진 상황에서 이번 이재용 부회장의 가석방 결정으로 자유로운 경제활동을 허용해준 점을 환영한다”고 했다. 한국경영자총협회는 “이 부회장에 대한 가석방 결정은 경영계 입장과 국민적 공감대가 받아들여진 것으로 매우 다행”이라면서도 “다만 가석방은 취업제한, 해외 출장 제약 등의 어려움이 있어 이 부회장이 경영 활동에 전념할 수 있도록 최대한의 행정적 배려가 필요하다”고 촉구했다.
한편 정치권의 입장은 엇갈렸다. 이소영 더불어민주당 대변인은 “삼성이 백신 확보와 반도체 문제 해결 등에 있어 더욱 적극적 역할을 해주기를 바란다”고 했고, 전주혜 국민의힘 원내대변인도 “코로나19 장기화와 대내외 어려운 경제 여건 가운데, 의미 있는 결정”이라고 평했다. 반면 심상정 정의당 의원은 “대한민국의 법치가 또 한 번 시장 권력 앞에 무너졌다. 촛불 배신이자 (문재인 정부의) 자기 부정”이라고 반발했다. 열린민주당도 “결코 동의할 수 없다”고 반대의 뜻을 밝혔다. 차기 대권주자들의 입장도 판이했다. 여권에서는 이재명·이낙연·정세균 후보가 법무부 결정을 존중한다는 뜻을 밝혔고, 추미애·박용진·김두관 의원은 반발했다. 야권에서는 윤석열 전 검찰총장을 비롯해 거의 모든 잠룡들이 환영의 뜻을 드러냈다.
특히 노동계와 시민단체의 반발이 잇따르는 등 현 정부의 핵심세력인 진보진영에서 ‘찬반 논란’이 격화되자 박 장관이 직접 진화(鎭火)에 나섰다. 박 장관은 10일 국무회의를 마치고 정부과천청사로 복귀하는 길에서 기자들과 만나 “이재용씨만을 위한 가석방이 아니다”라고 밝혔다. 그는 “가석방 요건에 맞춰 절차대로 진행한 것이고 이재용씨도 예외가 될 수 없다”며 “가석방 예비심사 대상자 선정기준을 낮춰 이제 복역률 50% 이상이면 대상자가 된다. 특혜가 아니다”라고 설명했다.